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박정희와 성철 그리고 김수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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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1977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에 들렀다. 방장(方丈)인 성철 스님을 보고 싶어했다. 해인사 주지가 백련암에 뛰어갔다. “큰스님이 절까지 내려와 영접해 주면 좋겠습니다.” 성철 스님은 돌아앉았다. “나는 산에 사는 중인데, 대통령 만날 일이 없다 아이가.” 그렇다고 박 대통령은 분노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소중한 선물을 줬다. 해인사 옆 골짜기의 말라 죽는 소나무들을 봤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려 내라”는 지시에 정부는 3년간 방제에 매달렸다. 소나무 숲은 다시 싱싱해졌다.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아름다운 장면이다.

 2000년의 일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상(心山賞)을 받았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독립투사이자 유교(儒敎)의 거봉이다. 김 추기경은 관례에 따라 서울 수유리의 심산 유택(幽宅)을 찾아 넙죽 6번이나 큰절을 올렸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추기경님이 절을 다 하시느냐”고. 그는 되레 의아해했다.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인사드릴 어른인데, 돌아가셨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심산연구회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나중에 남몰래 작은 상자를 보냈다. 상금 700만원에 300만원이 보태져 있었다. 이웃 종교까지 배려하는 열린 마음과 낮은 자세가 묻어난다.

 필자의 종교 경험은 논산 신병훈련소가 전부다. 일요일마다 지겨운 사역을 피해 교회·절·성당으로 도망 다녔다. “종교 집합!” 소리가 들리면 연병장 뒤를 어슬렁거렸다. 앞줄은 언제나 독실한 신자들 차지였다. “오늘, 기독교가 너무 많아.” 연단의 선임하사가 고함치면 재빨리 짧은 줄의 천주교나 불교로 갈아탔다. 필자의 종교는 3주 연속 바뀌었다. 이런 문외한(門外漢)의 눈에도 요즘 종교 갈등은 심상찮아 보인다. 위험 수위다.

 얼마 전 국회에서 이슬람 채권 법안이 휴지통에 들어갔다. “이슬람 채권=테러자금”이란다.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빌리는 데도 이 모양이다. 왜 영국·프랑스·일본은 이슬람 채권을 발행했을까. 종교가 문제라면 왜 우리는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하는가. 의원들이 사석에서 고백한 폐기 사유는 분명하다. “지역구 종교단체에서 전화를 걸어와 솔직히 부담을 느꼈다.” 정치가 종교에 오염된 것이다. 미국은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옆에 이슬람 모스크가 들어서는 것을 허가했다. 미 국민의 60% 이상이 반대한 사안이다. 미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 간의 화해’를 내세워 눈을 딱 감았다. 표결은 9대 0 만장일치였다.

 요즘 우리 종교계는 퇴행(退行)하는 느낌이다. 거친 표현부터 마음에 걸린다. 템플스테이 예산 삭감에 아무리 뿔났어도 “앞으로 청와대·여당의 전화는 일절 받지 마라”는 건 너무했다. 천주교 일부 사제의 성명은 ‘추기경의 궤변’이란 제목부터 섬뜩하다. “정부를 편드시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지 여쭙고 싶다”는 비아냥은, 감히 성직자의 표현이라고 믿기 어렵다. 우리는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남을 자극한 경우를 기억하지 못한다. 항상 표현은 부드러웠다.

 종교 갈등 배경을 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럴듯하지만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크게 보면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국민적 존경을 받던 큰 어른들은 사라지고, 그들이 남긴 ‘권위의 공백’은 메워지지 않고 있다.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은 종교를 표(票)로 간주하고 있다. 스스로 정치를 오염시키는 불길한 징조다.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면 지역 갈등·이념 대립에 종교 갈등까지 포개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사회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사회’로 변질되면 끔찍한 재앙이 기다린다. 그나마 인구조사 결과는 유일한 위안이다. 요란하게 포교해 온 종교의 신자는 줄고, 조용히 수행하면서 기다려 온 쪽의 신도 수는 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균형감각을 믿고 싶다. 그래도 불안하다. 어느 때보다 종교의 틀을 뛰어넘은 큰 인물의 빈자리가 아쉽다. 무게 중심이 사라졌다. 오늘 따라 박정희, 성철, 김수환의 얼굴이 한층 그리워지는 하루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