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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종목’ 착안해 200명 선수에게 전액 자비 부담 요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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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호 14면

<1>대회 개막식에서 선수소개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참가자들. <2>남자부 호주 선수들의 경기 모습. <3>사물놀이 체험프로그램에서 한 선수가 장구를 배우고 있다. [사진=의성 국제 컬링 대회 홈페이지]

“경북도민체전도 한 번 안 해본 우리 의성이 국제대회를 제대로 치러낼 수 있을까.”
“의성에는 호텔도 하나 없고 모텔 몇 개 밖에 없는데 이러다 국제망신 당하는 것 아닐까.”
“지난번 상주 세계대학생승마대회는 동네잔치에 수백억 예산 썼다며 지역 언론에 엄청나게 깨졌다는데.”

도민체전도 못 치른 의성군이 국제컬링대회 개최한 힘

모두들 걱정을 했다. ‘2010 경북의성 아시아태평양컬링선수권대회’라는 긴 이름의 국제대회를 앞두고서였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던 지난 11월 15일 개막해 9일간 열린 이 대회는 아시안게임 열기에 묻혀 조용히 지나갔다. 중앙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대회는 그동안 우리나라가 개최했던 수많은 국제 스포츠대회의 관례를 깬, 대단히 의미 있고 성공적인 대회였다. 한국을 비롯해 호주·중국·일본·대만·뉴질랜드 등 6개국 20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의 예산은 고작 5억원이었다. 지난 10월 30일부터 나흘간 경북 상주에서 열린 세계대학생승마선수권대회 예산은 200억원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5억 들여 9일간 대회, 만찬 티켓도 판매
의성은 올해 초 호주·뉴질랜드 등 컬링 강국들을 제치고 대회 개최지로 선정됐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일방적으로 퍼주는 대회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당당하면서도 정감 있는 자세로 손님을 맞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스포츠 행사를 통해 지역의 문화·관광·산업을 홍보하고 교류하는 장을 만들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참가 선수단 전원을 글로벌 문화교류 특별위원으로 위촉해 국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한마디로
‘돈은 최소한으로 들이고 실속은 최대한 챙기는’ 대회로 치르겠다는 의도였다.

참가 선수와 임원은 자국에서 출발해 대회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모든 경비를 자비 부담하게 했다. 기존 국제대회가 숙식 제공은 기본이고 특급 선수들에게는 왕복 항공권에 참가비까지 주던 것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도비 4억원, 군비 1억원으로 마련된 예산으로는 뭘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개막식과 폐막식 만찬도 국제 관례에 맞춰 참가 선수와 임원에게 입장권을 팔았다. 개막식 만찬은 3만원, 술이 포함된 폐막식 만찬은 3만5000원을 받았다.

‘전액 자비 부담’ 원칙이 가능했던 건 컬링이라는 종목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컬링은 얼음판 위에 돌(스톤)을 굴려 과녁에 접근시키고 상대 돌은 쳐내서 점수를 겨루는 게임이다. ‘얼음판 위의 체스’라는 별명을 가진 고급 스포츠라 선수 대부분이 직업을 갖고 있다.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도 많다. 이들은 여행 삼아 자비를 들여 각 나라를 돌며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대회는 150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물 흐르듯 진행됐다. 이들은 5000원짜리 도시락 하나만 먹고도 열성적으로 일했다. 특히 통역요원들의 활약이 빛났다. 이들은 사전에 의성 일원의 명승지에 대한 정보를 숙지했다. 경기 사이에 3시간 정도 틈이 나면 “여기서 조금만 가면 산수유마을이 있는데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몇 백 년 앞선 애틋한 러브스토리의 배경이 된 곳이지요. 꽃들이 화사하게 핀 오솔길이 정말 예쁘답니다”라며 선수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대회 입장권은 5000원부터 최고 2만원까지 종류를 나눠 팔았다. 입장권 수입 58만5500원은 전액 의성군청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냈다. 남녀부로 나눠 치러진 대회에서 한국과 중국이 나란히 결승에 올라 여자는 한국, 남자는 중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정감 있고 당당한 자세로 접근
경기가 없는 날 선수단과 심판진은 경북 일원의 관광지와 문화 탐방에 나섰다. 이 또한 모두 유료였고 사전에 인터넷과 e-메일로 예약을 받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와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또 윷놀이·한복입기·사물놀이·공예품 만들기 등의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 한국의 전통을 느껴보기도 했다.

1300년 된 고찰인 의성 고운사에서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스님이 불교와 절집의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한 뒤 절을 한 바퀴 도는데 마침 기와불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외국 선수들이 “저게 뭐냐”고 묻자 스님은 “절을 중건하는 데 정성을 모으는 것으로 기와에 마음을 담고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설명해 줬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기와 한 장씩을 사서 이름을 적어 냈다.

대회 내내 선수단과 심판진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심판장인 키즈 웬도르프(캐나다)는 “이번 대회는 관계자와 주민들이 함께 하는 축제처럼 보였다. 어느 대회에서나 크든 작든 사고는 있게 마련인데 의성 대회는 완벽했고, 물 흐르듯 진행됐다”고 극찬했다.

경기장의 빙질을 관리하는 아이스메이커인 마크 칼란(스코틀랜드)은 의성컬링센터의 시설을 높이 평
가했다. “컬링장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장비와 시설이 100% 만족할 정도로 좋았다”고 말한 그는 “매일 다른 문화체험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불고기와 마늘 맛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화룡점정’은 폐막식 만찬장에서 이뤄졌다. 대회 기간 경기와 명승지 방문, 문화체험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상영하고 이를 CD에 담아 모두에게 나눠줬다. 어색하게 한복을 차려 입고, 윷놀이를 하는 장면 등이 나오자 참가자들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 술도 한 순배씩 돌아 취흥이 무르익을 무렵 사회자가 말했다. “저희 의성은 이번 대회에 참가한 여러분과의 인연을 소중히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를 의성 홍보대사로 모시고자 합니다. 동의해 주실 거죠.” 그러자 “예스”라는 큰 메아리가 돌아왔다. 한국을 제외한 5개국 선수단 전원과 심판 5명이 ‘글로벌 문화교류 특별위원’이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이들은 의성군으로부터 관광·특산품 등 각종 자료와 선물을 제공받고, 본국에서 경북의 명승지와 의성 특산품인 흑마늘을 홍보하게 된다.

경기 없는 날 관광도 유료로 진행
김복규 의성군수는 입이 귀에 걸렸다. 인구 6만에 60대 이상 노인이 30%를 넘는 쇠락한 고을이었던 의성이 컬링대회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를 성공으로 이끈 ‘투 톱’을 꼽으라면 단연 김경두(53) 조직위원장과 김응삼(45) 조직위 사무총장이다. 경북과학대 사회체육학과 교수인 김 위원장은 1990년대 중반 국내에 컬링을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고향인 의성에 국내 유일의 컬링 전용경기장을 유치해 의성을 ‘한국 컬링의 메카’로 세워놨다. 유도 선수 출신인 그는 무도인(武道人)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을 앞세워 이번 대회 개최권을 따 왔고,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고의 대회를 치러냈다.

김 위원장은 “90년대 중반에 호주에서 국제 컬링대회가 있었는데 당시 우리 돈 1000만원 정도밖에 안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들, 따뜻한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아주신 의성군민과 공무원 덕분에 대회를 잘 치를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경북체육회 운영과장을 맡고 있는 김 총장은 체육정책 박사 출신답게 이번 대회의 목표와 방향, 세부 준비사항을 꼼꼼하게 정리해냈다. 그는 “국내에서 국제대회만 열렸다 하면 외국 선수들에게 퍼주지 못해 안달하는 관행을 바꾸고 싶었다. 문화체험과 관광, 국제 인적 네트워크 형성이 어우러지는 대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그 시금석을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경험이 없다고, 예산이 적다고 못하는 게 아니다. 열정만 있다면 못할 게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작은 것을 갖고도 의미 있는 성공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들이 우리 시대의 ‘작은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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