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1) 국군 증강 작업 계획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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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1951년 경기도 안양 인근의 수리산에서 격렬한 참호전을 펼치고 있다. 52년 중부전선에서 불붙은 고지전 기간 동안 중공군은 후방에 깊고 긴 터널을 구축해 미군의 포격을 피하면서 전투에 임했다. 그해 가을 벌어진 저격능선 전투를 중국은 ‘상감령 전역’이라고 부르며 대승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해방군화보사]

저격능선 전투에 관해 덧붙일 말이 하나 있다. 중국은 자신들이 한반도 땅에서 벌였던 이 전투를 ‘상감령(上甘嶺) 전역(戰役)’이라고 부른다. 미국에 대항하면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전투, 즉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중국이 적고 있는 한반도 참전 전투 중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둔 싸움이라고 스스로 선전하고 있다.

 나는 저들이 왜 그러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싸움에서 졌고, 희생 또한 아군의 2배에 이를 정도로 막대했다. 그래도 결국 휴전 직전에 이곳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적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싸움의 승패는 분명했다. 1952년 늦가을에 벌어진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공군은 패퇴했고, 고지를 아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분명한 패전이면서 왜 승전(勝戰)으로 적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종의 자체 선전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내용도 계속 우기면 진실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자체는 영원히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제 입맛에 맞게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이다. 자신의 입맛에 따라 현상과 사실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우기는 버릇이 있는 편이다.

 당시 고지전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은 결코 뚜렷한 승세(勝勢)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군에 밀리는 편이었다. 중국 측은 그런 상황 속에서 ‘상감령 전역’이라는 거짓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들의 전과(戰果)를 부풀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중부전선의 모든 고지는 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늦가을에 온 산야를 붉게 물들이는 풍엽(楓葉)처럼 중부전선의 거의 모든 고지는 그렇게 아군과 적군이 서로 흘리는 피로 물들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고지전을 수행하면서도 우리는 발 빠르게 국군의 재건, 나아가 전쟁으로 크게 기우뚱거렸던 대한민국을 새로운 발전의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는 작업을 벌여야 했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전선은 오히려 급박하게 요동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육군참모총장이던 나는 국군의 전력 증강 사업이라는 가장 높은 목표를 향해 차분하게 발을 내디뎌야 했다.

중국이 항미원조의 승전 신화로 만든 ‘상감령 전역’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만든 포스터. ‘(병사) 황지광이 몸을 던져 불을 뿜는 (적의) 기관총을 막아내다’라는 선전 문구가 적혀 있다.

 저격능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직후, 또는 그 직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느닷없이 내게 연락을 해왔다. “서울의 8군 사령부로 올라와 잠깐 만나자”는 기별이었다. 늘 만나던 밴플리트 사령관의 연락이었던 터라 나는 다른 생각 없이 서울로 올라가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구 육군본부 근처에 함께 머물던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언 소장도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와 탁자를 중심으로 자리에 앉은 나에게 밴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 증강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때가 된 것 같다. 백 장군이 직접 한국군을 어떻게 증강하는 게 바람직한지, 그 계획을 한번 짜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내 귀가 번쩍 뜨였다. 평소 귀를 닫고 있지는 않았지만, 밴플리트 장군의 그 말은 너무나 크고 강하게 내 귀를 울렸던 것이다.

 전력 증강 사업은 대한민국 국군의 숙원(宿願) 사업이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가 미군과 연합군의 참전으로 겨우 숨을 돌린 마당이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국가를 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가장 필요했던 것은 국방력이었다.

 그러나 국군 전력 증강은 대한민국 자체의 힘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하더라도 그 기초를 이루는 물자와 장비, 무기와 화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핵심 키를 쥔 쪽은 미군이었다. 한반도 작전권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대한민국의 안보를 떠받치고 있던 미 8군의 사령관이 “이제 한국군의 전력 증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때”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이상의 의미가 담긴 발언이었다.

 나는 내심으로 ‘뭔가 내가 모르는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너무나 절실히 기다렸던 국군 전력 증강 사업이라서 거침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자립, 즉 ‘셀프 스탠딩(Self standing)’을 강조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북한을 독자적으로 상대해 막아내야 한다는 게 그 핵심 요지였다.

 한반도에 참전한 미군 입장에서 볼 때에도 무한정 미군을 이 땅에 주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장은 대량 지원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 국군이 자체적인 방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솔직히 나는 내심으로 ‘미군이 이제는 발을 뺄 때가 된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자립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대구로 돌아와 정래혁 작전교육국장을 불렀다. 밴플리트 장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한 다음 그런 취지로 국군 전력 증강 사업 계획을 짜보라고 지시했다. 대구에 있던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여러 가지를 검토하면서 계획안을 짜보도록 했다. 밴플리트 장군의 핵심 복안은 국군의 사단 수를 10개에서 20개로 늘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국회의장까지 지내게 되는 정래혁 국장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정 국장은 평소 과묵하지만 일을 매우 꼼꼼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육군본부 인근에 있던 미 군사고문단과 긴밀하게 협의를 진행했다. 나도 육군본부와 서울의 미8군 귀빈 숙소인 필동 코리아 하우스 자리의 게스트 하우스를 오가면서 8군 참모들과 부지런히 만나 논의를 이어갔다. 어떻게 하면 한국군 전력을 제대로 증강할 수 있을까를 두고 우리는 밤낮 없이 의견을 나눴다. 그렇게 10여 일이 흘렀다. 두꺼운 차트가 만들어졌다. 라이언 소장은 내 앞에서 그것을 들춰 보이며 만족스러워 했고, 나 또한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동숭동의 밴플리트 사령관을 찾아 나섰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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