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서 ‘찜질방 난민’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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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1·23 북한 포격 도발 이후 연평도를 탈출한 주민 1300여 명이 지금 인천에서 힘겨운 ‘난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연평도 전체 주민 1371명 가운데 1343명이 뭍으로 빠져나와 찜질방과 모텔, 친인척 집, 병원을 전전한다. 특히 1000여 명이 몰린 인천의 한 찜질방은 ‘피란민(避亂民) 대피소’로 둔갑했다. 거동조차 힘든 노인들, 생업을 뒤로 하고 떠나온 가장(家長),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이들이 뒤엉켜 북새통이다. ‘찜질방 난민’들은 새우잠을 자며 무료로 제공되는 국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다. 좁은 모텔 방 한 칸에선 일가족 4명이 5000원짜리 국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광경도 허다하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심한 자화상이다. 어느 나라에서 적군이 느닷없이 발사한 포탄의 공포로 정든 고향을 등진 주민들을 찜질방에 방치하던가. 이들을 국가 예산으로 돌보지 않는 국가가 G20 정상회의 주최국 맞나. 어선(漁船)에 의지한 주민의 엑소더스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임시 거처도 마련하지 못하는 청와대 지하벙커 회의는 뭐 하러 했는가. 무상급식비로 수백억원을 내놓는 인천시는 자기 관할 주민들의 구호비조차 댈 돈이 없단 말인가. 필리핀이 유사시 한국에 체류 중인 필리핀 노동자들의 대피책 수립을 지시했다는 소식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피란민들은 돌아가자니 불안하고, 눌러앉자니 생계수단이 막막하다. 참으로 참담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태껏 정부가 내놓은 구체적인 대책이라곤 연평도에 특별교부세 10억원을 지원한다는 게 고작이다. 방어대책이나 대피시설 마련에 손 놓고 있다가 이번 사태를 야기한 정부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처사다.

 현재 연평도에는 주민 28명만 남아있다. 인천으로 옮긴 주민이 되돌아가지 않으면 연평도는 ‘무인도(無人島)’ 또는 ‘유령의 섬’이 될 공산이 크다. 연평도가 무인도가 되면 북방한계선(NLL)을 따라 이어지는 우도를 비롯해 소청도∼대청도∼백령도 등 서해 5도에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포격 이후 백령도· 대청도·소청도에서도 수백 명이 섬을 빠져나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국민 없는 영토’로 놔둘 순 없다. 이는 NLL을 무력화하려는 북한의 노림수에 휘말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더 큰 도발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뒤늦게나마 여권이 ‘서해 5도 지원 특별법’을 마련해 오늘 제출하기로 했다. 서해 5도 주민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목표로 한 개발계획이 골자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주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서해 5도를 군사적으로 요새화해야 한다. 북한의 공격을 능히 격퇴할 수 있다는 신념을 주민들에게 줄 수 있도록 전력을 증강하고, 대피시설을 완벽하게 조성해야 한다. 탁상행정으로 시간 끌지 말고 ‘서해 5도 정책’을 조속히, 내실 있게 집행하라.

 지금 한반도는 한국전쟁 60년 만에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선 전면전에 대한 우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사실상 준전시(準戰時) 상태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철통같이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을 때 국민도 북한의 도발에 의연하게 맞설 용기를 갖는다. 국민 보호는 국가의 첫 번째 존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