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송호근 칼럼

버려진 연평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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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연평도가 공격을 당한 지난주 화요일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불안하다. 허탈하다. 포화가 멎은 후 57년 동안 다스려왔던 전쟁의 공포가 이렇게 느닷없이 다시 엄습해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기에 불안하다. 땀 흘려 번 돈을 쏟아부었던 저 국방 상태가 해안포 백수십 발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음을 목격했기에 듬직했던 성벽이 무너지듯 허망하다. 천안함 사태 때만 해도 최첨단장비를 무력화하는 서해(西海)의 탁한 시계(視界)와 빠른 조류 때문에 먼바다에서 감행한 잠수함 공격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을 거라고 애써 이해했다. 그런데, 이건 백주 대낮에, 해안포 기지의 포문이 열리고 백수십 발의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실전 상황에서 겨우 네 문의 자주포로 응사했던 게 대한민국의 실력이자 방위전략의 모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믿었던 가장(家長)이 까닭 없이 실종된 듯한 막막함, 국민의 안위를 지켜줄 국가의 허우대가 그토록 허약했음을 인정해야 하는 공허감은 급기야 자제할 수 없는 분노로 변하고 있다.

 수백 명의 군사전문가, 수백 명의 현역 장성, 수천 명의 퇴역 장군이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민감한 작전지역인 서해 5도를 겨우 열두 문의 자주포로 버텨왔다는 것을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의 기다란 해안 방어선을 몇 개의 섬으로 대적하는 NLL의 지형적 특성에 적합한 비상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다.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서 군사력의 열세를 보강한다는 그 원칙, 초보자라도 생각해낼 수 있는 그 전략 말이다. 그런데, 실전 상황에서 그 시나리오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민가를 피하는 것이 전쟁의 국제 수칙이거늘, 맨손의 민간인을 정조준해 살상을 감행하는 광란의 적을 제압하지 못하면 군대가 아니다. 출동도 못한 해군이나, 상공을 맴돌면서 화염이 치솟는 것을 구경만 한 공군은 군대가 아니다. 그냥 공중 에어쇼였을까. 기습 포격을 한 시간 이상 당하면서도 첨단 화력을 쓰지도 못했던 대한민국의 군대는 그 허망한 실제 모습을 드러냈다.

 한반도의 화약고 NLL의 심장부 연평도를 지켰던 것은 고장 난 장비, 망가진 전략 시나리오, 그리고 확전(擴戰) 공포였다.

 더 허망한 것은 피격 당일 오후에 일어났던 주민의 엑소더스다. 적의 공격이 중단되었을 때 군대는 주민을 소개시킬 것인지, 어떻게 안전하게 후송할 것인지를 신속하게 결정해야 한다. 사상자의 응급처치와 주민의 안전은 실전 시나리오의 또 다른 한 축이다. 소개 명령이 즉시 하달되고, 해군 함정과 공군 헬기가 즉각 출동해서 공포에 떨고 있는 연평도 주민을 일사불란하게 육지로 대피시킬 거라고 기대했다. 청와대의 지하벙커 회의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전략적 포인트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지하벙커에 모인 전략사령탑의 어느 누구도 주민의 안전한 후송작전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북한의 공격이 진행되던 한 시간여 동안 확전 공포를 두고 입씨름만 했을 따름이다. 소개를 결정한 것은 주민 비상대책위였다. 국가가 보내준 어떤 수송수단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상비약과 옷가지도 놔둔 채 어선과 여객선을 타야 했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을 달랠 국가의 손길은 없었다. 보트 피플이나 다름없었다. 59년 전, 흥남 철수에는 그나마 미국의 대형 수송선이라도 있었지만, 2010년 연평도 철수에는 똑딱선과 꽃게잡이 어선 선단이 거센 물결을 헤치고 뭍으로 달렸다.

 국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몇 배로 응징하겠다는 결기에 찬 말들이, 최첨단 화력으로 재무장하겠다는 군 수뇌부의 사후 대책들이 괘씸하다 못해 불쾌하게 들리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한국의 아버지들이 사명감을 갖고 치러냈던 군 복무의 결과가 고작 후진국 군대만도 못한 오합지졸의 광경으로 연출되고, 한국의 어머니들이 눈물을 삼키며 보낸 자식들을 싸늘한 시신으로 돌려받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군대를 두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월급에서 꼬박꼬박 제했던 그 엄청난 국방비는 다 어디에 썼기에 손 한번 못 써보고 침몰당하고 피폭당하는가? 용맹스러운 훈장과 화려한 제복에 빛나는 그 군사전문가들은 민간 연락선이 부지런히 탈출 행렬을 도울 때 어떤 상념에 잠겨 있었는가? 세기의 부랑아 집단과 대적하는 대한민국에 도대체 믿을 만한 방위전략은 있는가, ‘국민의 군대’는 있는가?

 미국의 호화군단이 해상시위를 한들, 천안함과 연평도에서 산화한 우리의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연평도의 부서진 삶과 국민의 무너진 신뢰는 복원되지 않는다. 버려진 연평도, NLL의 전략적 요충지 연평도가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면, 대한민국 어느 곳도 그렇게 버려져 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철통국방을 입버릇처럼 외치는 이 ‘허망한 국가’ 앞에서 국민들은 허탈하다. 망연자실할 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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