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음악’이 만드는 좋은 세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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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09면

22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오케스트라가 정좌해 있고 정명훈과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 첼리스트 송영훈이 등장했다. 바이올린ㆍ첼로를 위한 브람스 2중 협주곡이라도 연주할 듯 보이는 익숙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뒤에 젊은 지휘자 한 명이 함께 나섰다. 그러고 보니 무대 위에는 피아노도 있었다.
관객들에게 인사한 뒤 정명훈은 피아노에 앉았다. 젊은 지휘자는 그의 아들 정민이었다. 독일 자르브뤼켄에서 1984년 태어난 정민은 프랑스와 서울대에서 콘트라베이스·바이올린·피아노를 공부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에 전념한 그는 ‘부자(父子) 지휘자’의 활약에 기대를 걸게 한다.
1부 연주곡은 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토. 익숙하게 오케스트라를 독려하는 정민의 지휘봉에 맞춰 현악군이 부드럽게 주제를 연주하고 베토벤 특유의 웅혼한 기상이 용기를 북돋웠다. 세 명의 연주자는 서로의 눈을 맞추고 지휘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윽한 송영훈의 첼로와 따스한 김수빈의 바이올린 위에 정명훈의 노련한 피아노가 어우러졌다.
아름다운커피가 주최하고 아름다운가게와 스타미디어가 주관한 ‘2010 공정무역 나눔 콘서트’의 도입부였다. 공정무역이란 다국적 기업과 중간상인들의 횡포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저개발국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 경제적 자립을 돕는 운동이다. 저개발국에 생산력을 키우고 자립 기반을 마련해 주는 공정무역은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선진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원조보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훨씬 좋은 방안이다.

정명훈·정민 父子 공정무역 나눔 콘서트, 22일 세종문화회관

이렇게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취지에 공감해 온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이번 콘서트를 준비하며 예술계에서 공정무역을 지지하는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아들인 지휘자 정민과 나눔을 대물림하는 뜻깊은 자리에 첼리스트 송영훈과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이 동참해 이뤄진 이번 콘서트의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의 공정무역 브랜드인 ‘아름다운커피’ 매장 개설과 저개발국 산지 개발 프로그램에 사용된다고 한다.

무대 위의 악단은 부산 소년의집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미라클오브뮤직 연합 오케스트라였다. 79년 창단한 부산 소년의집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정민의 인연은 2007년 시작됐다. 신세계백화점(2007), 극장 용(2008), 성남아트센터(2009) 등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한 것은 올해. 지난 2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부산 소년의집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성공적인 자선 공연을 이끌었다. 또 7월 국립오페라단의 ‘어린이와 마법’과 10월 ‘나비부인’ 안동 공연 지휘를 맡아 호평을 받았다.

인터미션 뒤 메인 레퍼토리인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펼쳐졌다. 세 명의 솔리스트가 든든한 원군처럼 느껴졌던 전반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지휘자 정민은 바람 부는 광야에 서서 온전한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2부는 그의 지휘를 유심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적재적소에 단호한 힘을 부여해 역동적인 궤적을 그리는 그의 지휘봉은 적잖은 시간을 들인 노력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정직하게 보여 줬다. 직선적인 그의 지휘봉에는 젊은 패기가 서려 있었다. 특히 곡상이 고조되거나 격앙되는 부분에서 극적으로 승화시키는 지휘의 미학은 아버지를 닮았다. 지휘봉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은 지휘봉의 끝에 치열하고도 단호한 마감을 새기는 듯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4악장에서 좌우 넓게 펼쳐진 관현악 대열의 발걸음을 각기 조절하며 대오를 유지하는 데 잠깐 어려움이 느껴졌지만 적시에 터지는 시원한 금관과 안정적인 목관, 현의 어우러짐은 차이콥스키의 명곡을 감상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일어서 인사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에 김수빈과 송영훈이 보여 깜짝 놀랐다. 지휘자를 집중해 보느라 수석 자리도 아닌 곳에서 숨은 그림처럼 연주하던 두 아티스트를 발견한 청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함없는 가치의 음악예술을 상징한 듯한 보기 좋은 라스트 신이었다.

사진 사단법인 미라클오브뮤직 제공


류태형씨는 옛 음반 감상과 생생한 공연 관람을 온탕과 냉탕처럼 반복하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음악 애호가다. 월간 ‘객석’ 편집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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