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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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505호실 여자 13

한밤이었고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라면을 끓여먹고 나서 설핏 선잠에 빠지려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다. 따따따 하고, 지팡이가 층계 모서리를 건들고 가는 알레그로였다. 자정이 가까웠다. 고요했고, 그래서 소리는 낮았으나 따따따는 건물 전체의 갈라진 틈을 타고 물기처럼 번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이 밤에 외출을?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내려오면 무슨 이유를 대든지 문을 열고 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좀 전에 들었던 따따따가 내려오는 소리였는지 올라가는 소리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유리는 젖어 있었다.
여자가 건물 안에서 갈 만한 곳은 옥상밖에 없었다. 잠이 오지 않거나 상념이 많아서 옥상에 올라갔을 수도 있었다. 옥상으로 쫓아 올라가볼까, 생각했다. 3층과 5층 사이의 자바라가 닫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자바라를 연다면 큰 소리가 날 터였다. 옥상까지 이어진 철제 비상계단이 뒤뜰 헛간 옆에 있긴 했으나 언제 무너질지 모를 만큼 낡았으며, 역시 입구부터 봉쇄되어 있었다. 외출했다가 한 시간쯤 전에 꼭대기층으로 올라간 ‘검투사’가 떠올랐다. 그에게 빌미 잡힐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를 쫓아 올라가 말을 걸 만한 명분도 없었다. 나는 지팡이 소리가 다시 나기를 기다렸다. 옥상에 올라갔다면 바람과 빗속에서 오래 지체하진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지팡이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환청이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서랍장엔 낮에 사온 쌍안경과 자일이 들어 있었다.
건물의 남쪽을 가로막은 암벽에 올라가면 여자의 방은 물론 옥상도 손에 잡힐 듯 바라보일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자일까지 쓸 일도 없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을 터였다. 나는 어둠 속에 은신하기 좋은 검은 우의를 걸친 뒤 쌍안경과 손전등만을 찾아 들고 소리 없이 뒤뜰로 나왔다. 비는 오는 듯 안 오는 듯했다. 산은 어둠 속에서 비어 있었다. 나뭇가지가 우의에 스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났다. 건물 쪽에서 보면 직벽 가깝게 벼랑을 이룬 암벽이지만 서쪽 비탈로 돌아가면 올라가기 어려울 게 없었다. 손전등은 켜지 않았다. 한때는 암벽등반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던 나였다. 숲은 캄캄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숲으로 돌아 암벽 위로 올라서자 샹그리라 건물 옥상이 수평으로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들을 역광으로 받은 옥상은 어슴푸레했다.
예상과 달리,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의 잔영을 받아 사람의 윤곽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둡진 않았다. 시선이 자연히 건물 아래로 내려왔다. 여자의 방, 505호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커튼도 열려 있었고 불이 밝았다. 불 밝은 오른쪽 창 너머는 침실이었고 어두운 왼쪽 창 너머는 주방 겸 거실인 것 같았다. 침실 안쪽에 가로 놓인 여자의 침대가 보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자의 침대 시트 역시 하얀 색깔이었다.
쌍안경을 들이댈 필요조차 없었다. 머리맡에 놓인 토끼 인형까지 육안으로 구별해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침대 앞으로 놓인 작은 탁자와 창밖을 향한 흔들의자가 보였다. 쌍안경을 비로소 들었다. 털실뭉치가 담긴 바구니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목도리를 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 전까지 작업을 하고 있었던 듯, 바구니에 걸쳐져 있는 목도리도 눈처럼 하얀색이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손의 감각만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가 눈앞을 스쳐갔다. 그리고 이어서, 기억의 어두운 우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어떤 삽화가 머릿속에 깜박깜박 하다가 어떤 순간 갑자기 불을 켰다. 전설이 되고 만, 소녀의 긴 손가락들이 먼저 떠올랐다. 기습적인 재생이었다. 눈가에 보랏빛 점이 박힌 소녀는 뜨개질하는 것을 좋아했다. 재생된 화면에서 소녀는 유연한 손놀림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첫눈 오기 전에…….”라고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첫눈 오기 전에 뜨개질이 완성되면 그 카디건은 아마 내 것이 될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주저앉았다.
소녀는 은행나무 아래의 평상에 앉아 있었다. 샛노란 은행 잎새들이 뜨개질바늘을 재바르게 놀리는 소녀의 머리 위로 연방 떨어졌다. 오랫동안 흔적조차 없이 지워졌었는데도 재생 화면은 놀라울 정도로 뚜렷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억상실자의 머릿속 캄캄한 회로에 불현듯 불이 켜진 것처럼, 기억과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시시각각 회복되고 있다는 생생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검투사가 사는 꼭대기층 너른 거실도 불이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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