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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일까요] 천재는 악필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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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초 학생들이 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두뇌발달과 인성교육을 목적으로 40년 넘게 글씨 쓰기 교육을 하고 있다. [황정옥 기자]

“괴발개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가 없네. 그렇게 써서 내용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가겠니?” 크기는 제각각이고, 띄어쓰기도 안 돼 있고…. 엉망인 자녀의 노트 필기를 보면 엄마들은 속상하다. 옛 선조들은 단정한 글씨로 사람됨을 판단한다(신언서판·身言書判)고까지 했는데. 하지만 글씨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굳게 믿는 말이 있다. ‘천재는 악필이다.’ 정말 그럴까.

박정현 기자
황정옥 기자

멘사 회원들 악필 비율 일반인과 큰 차이 없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원고를 교정·교열한 사람은 아내 소피아였다. 지독한 악필로 그의 글씨를 아무도 판독하지 못해서였다. 베토벤의 악필은 명곡의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본래 ‘테레제를 위하여(Fur Therese)’였다. 출판사 담당자가 ‘테레제’를 ‘엘리제’로 잘못 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천재들의 경우는 달랐다.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약관의 나이에 중국의 내로라하던 석학들과 논쟁을 벌일 정도였다. 한국서체연구회 허경우(서예가) 회장은 “서양이 기록이나 표현을 강조한 반면, 우리는 예부터 글씨 잘 쓰기를 강조했기 때문”이라며 “글씨를 교양과 덕목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에 대해 전문가들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허 회장은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은 영감을 잊기 전에 빨리 기록하는 것이 습관화돼 글쓰기에 소홀해진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SBS 방송 프로그램 ‘호기심천국’에서 천재로 불리는 베토벤, 아인슈타인의 필체를 조사해 정말 악필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었다. 아이큐가 높은 유명 멘사 회원들을 대상으로도 실험이 진행됐었다. 그 결과, 뉴턴이나 피카소는 악필이 아니었다. 멘사 회원들이 일반인보다 악필이 약간 많은 정도였다. 결국 필체는 지능이나 능력과 무관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김영훈 원장은 “천재가 악필이 될 개연성은 있다”고 말했다. 우뇌가 더 발달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창의력이 높은 반면, 산만하고 규칙이나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김 원장은 “이들은 맞춤법이나 기호를 제대로 쓰지 않거나 글씨를 가지런히 쓰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연습하면 글씨체 좋아지고, 인성에도 도움

19일 오전 10시 서울 도봉구 한신초 1학년 1반 교실. 이승임 교사가 노트에 모음과 자음을 하나씩 쓰자 실물 화상기를 통해 TV 모니터에 연필과 손가락 모양, 쓰는 순서 등이 그대로 표현됐다. 학생들은 이교사를 따라 한글 연습 노트에 ‘재미있는 놀이’라는 글을 썼다. 이 교사는 “연필을 잡을 때 힘을 주고 빼는 것을 잘해야 해. 글쓰기는 정성”이라고 설명했다. 이 학교는 개교 이래 40년 넘게 글씨 쓰기를 강조한 교육을 하고 있다. 전교생에게 ‘한신노트’라는 특별한 공책을 쓰게 하는데, 학년별·과목별로 모양이 다르다. 최경하 교감은 “글쓰기를 하면 두뇌 발달은 물론 마음도 차분해져 인성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 오은영 원장은 “이런 방법으로 매일 원고지 한 장씩 쓰는 연습을 하면 1년 후 글씨체가 몰라보게 좋아진다”고 설명했다. 연세휴클리닉 노규식 원장은 “굳이 글씨 연습이 아니어도 종이접기나 가위질 등 소근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놀이만 해도 글씨를 잘 쓰게 된다”고 조언했다. 축령복음병원 신성웅(소아정신과) 전문의는 “글쓰기를 아주 힘들어 하는 아이는 대근육부터 훈련한 후 소근육을 함께 키울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칠판이나 전지에 어깨를 이용해 큰 글씨를 쓰다가, 종이의 크기를 점점 줄여 그 크기에 맞춰 글씨를 쓰는 것이다.

 악필이면 두뇌 기능 이상을 의심해 봐야

글씨 쓰기는 학습 능력, 신체 발달과 관련이 있다. 시각운동 협응능력의 중요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쓰다 보면 미세신경이 발달해 균형감각과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 자녀가 악필이라면 이 기능에 이상이 있는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젊어서 악필인 사람은 파킨슨병이나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 노 원장은 “대뇌와 소뇌의 미세 협응능력이 떨어져서”라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인 경우 악필이 많다. 두뇌 발달과 관련해 대소근육의 조절이 원활하지 않아서 글씨가 삐뚤삐뚤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접점 맞추기, 각진 도형도 잘 못 그린다. 오 원장은 “ADHD 치료를 했을 때 가장 먼저 좋아지는 것이 글씨”라고 했다.

 악필 중에는 쓰기 장애가 있는 경우도 있다. 2002년 서울대학교 학습증진클리닉 조수철(소아정신과) 교수팀은 초등학생의 글씨 쓰기와 학습 능력이 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초등생 자녀가 정상보다 글자가 크고, 글자 사이의 간격은 넓지만 단어간 간격이 좁다면 쓰기 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쓰기 장애가 있으면 철자가 틀리는 것은 물론, 문법이나 구두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연구팀에 참여했던 신 전문의는 “적절한 위치에 글자를 배치하게 하는 소뇌 기능에 장애가 있으면 띄어쓰기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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