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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어릴 적, 이불장 에 숨은 기억, 그런 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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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은규씨는 “글쓰기란 나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 이었던 것 같다”며 “내 치유의 과정이 사회적으로 조금만 확장돼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뿔 제공]

그녀, 자동차 트렁크에서 잠을 청할 것 같진 않았다. 트렁크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트렁커(Trunker)』로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고은규(40)씨 말이다.

 『트렁커』의 여주인공 ‘온두’는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트렁크에서 잠을 청하는 유모차 판매 사원이다. 소설 첫머리엔 ‘슬트모(슬리핑 트렁커들의 모임)’라는 인터넷 카페가 등장한다. 작가는 여기에 ‘멀쩡한 집 놔두고 트렁크에서 처자는 인간들’이란 주석을 달고 온라인 회원은 988명이라고 능청스레 적어놨다. 그러나 인터넷을 검색해도 ‘슬트모’는 나오지 않았다. 작가는 “그런 카페는 물론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 공설운동장에서 아줌마들이 파워워킹 하는 걸 구경하며 앉아있었어요. 문득 운동장 옆 주차장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어떤 사람이 트렁크를 여는 걸 봤어요. 그 안에 사람이 있는 이미지가 떠오르더군요. 거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누구나 어렸을 때 이불장 같은 데 들어가 숨은 기억이 있을 거예요. 안전에 대한 본능, 자궁에 대한 회귀랄까.”

 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병적으로 숨어드는 사람들. 뭔가 과거의 상처가 있었으리라. 그것이 ‘온두’의 과거, 그리고 온두와 같은 트렁커 신세인 남자 주인공 ‘름’의 과거가 됐다. 여자에겐 가족끼리 동반자살하려던 부모들 틈에서 혼자 살아남은 끔찍한 과거가 있고, 남자는 아버지의 잔인한 폭력에 시달려 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다.

 소설은 두 사람이 어쩌다 트렁크가 아니면 잠을 청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는지, 그 근원적 상처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가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더없이 경쾌하다. 여주인공 이름 온두는 ‘뜨거운 콩’이란 뜻이고,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성이 이, 이름이 름인 이름’이라는 데서부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소설 내내 작가의 능청스런 ‘입담’도 끝없이 이어진다. 특히 두 남녀가 주고받는 대사가 압권이다. 남자가 “온두씨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라고 하는데 여자는 “고마운데, 상당히 간지럽네요. 불개미들이 내 몸에서 108배를 하는 것 같아요”라 받아친다.

 고씨는 “무거운 주제일수록 현재 서사는 가볍게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 자신의 캐릭터가 반영된 때문인 듯도 했다. 트렁크에서 실제로 잘 만한지 테스트하려고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트렁크에 들어갔다가 갇혀 119 구조대를 부른 적도 있다.

 고씨는 고교 때부터 글을 썼으나 30대 후반에야 작가가 된 늦깎이다. 공동수상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다. 그는 함민복 시인의 시 ‘긍정적인 밥’을 화두로 꺼냈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 줄 수 있을까’(부분)

 “오랫동안 떨어져보면 알아요. 1등이 되지 못하면 글을 발표조차 못하는 시스템에 질린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야 제 글을 사랑하고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겠지만, 5000만 원어치 주린 배를 채울 만큼의 시장가치가 있을까요?”

이경희 기자

◆고은규 프로필=1970년 서울 출생. 2007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현재 동 대학원 수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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