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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삼키고 명품 시장 통일 꿈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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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22면

세계적인 명품 그룹인 프랑스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회장 베르나르 아노(61)의 별명은 여러 개다. ‘명품 업계의 록펠러’ ‘양키식 경영의 전도사’ ‘프랑스 재계의 마오쩌둥’ 등이다. 모두 아노의 비즈니스 행태를 빗댄 것들이다. 그는 군웅할거한 프랑스 명품업체들을 사들여 트러스트(대기업)를 설립했다. 마치 미국의 존 D 록펠러를 떠올리게 한다. 록펠러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군소 원유 채굴 회사를 흡수해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했다.

명품 세계의 록펠러 베르나르 아노 LVMH 회장

아노는 명품 제국 LVMH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미국식 인수합병(M&A)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업 사냥은 1980년대 후반 프랑스에선 아주 낯설었다. 그가 양키식 경영의 전도사로 불리는 까닭이다. 또 아노는 LVMH 초창기 사내 적의 적과 제휴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거머쥐었다. 마오쩌둥의 국공합작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아노가 업(業)을 이룬 과정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거대 기업을 일구는 데는 성공했다.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자회사 60곳을 지배하고 있다. 그의 LVMH는 지난해 231억8800만 달러(26조원)어치 명품을 팔아 23억8600만 달러(2조6700억원)의 순이익을 거둬들였다. 이제 만복감을 느긋하게 즐길 만하다.

그러나 아노는 여전히 허기를 느끼는 듯하다. 그가 2008년부터 프랑스 명품 회사인 에르메스의 지분 17.1% 정도를 몰래 매집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파리 증권거래소가 깜짝 놀랐다. 지분 5% 이상을 사들이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5% 룰)는 게 파리거래소 규정이다. 파리거래소는 아노의 우회 기동전에 허를 찔린 셈이다.

그는 ‘현금으로 차액을 결제하는 주식 스와프’라는 기법을 썼다. 에르메스 주식을 서로 약속한 가격과 날짜에 사고팔기로 한 투자은행과 약속한 것이다. 주가가 계약 가격보다 오르거나 떨어지면 그 차액을 현금으로 주고받는다. 이런 주식 스와프는 애초 헤지 수단으로 개발됐다. 요즘엔 감독당국 몰래 인수하고 싶은 기업의 지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아노처럼 스와프 계약을 사들인 쪽이 만기에 실제 지분을 넘겨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노의 우회 기습에 에르메스 쪽은 화들짝 놀랐다. 서둘러 투자은행 BNP파리바를 방어작전 자문사로 선정했다. 프랑스 금융감독 당국에도 항의했다. 아노의 파생상품 게임이 적법한지 여부를 프랑스 정부가 조사하도록 했다. 에르메스 지분 75%를 보유한 에르메스 가문 사람들은 아노를 ‘훼방꾼’ ‘침입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아노가 정상적인 경영을 방해하고 평온함을 깨는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다.

아노는 프랑스 최고 기업 사냥꾼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빌리언달러 딜(인수가격이 10억 달러 이상인 M&A)’을 여러 건 해치웠다. 그는 “에르메스를 인수하려고 지분을 확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먼저 공격한 뒤 몸을 슬쩍 빼며 상대 반격을 무력화시키는 수법이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2001년부터 에르메스 지분을 조금씩 사들였다. 그는 “(에르메스는) 명품 업계의 보석 같은 회사”라고 극찬했다.

에르메스는 세계 명품 시장의 판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이다. 에르메스 매출액이 지난해 기준으로 26억 달러 안팎이다. LVMH 전체의 11% 수준이다. 하지만 명품 세계에서 매출액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숫자로 표현하기 힘든 전통·명성 등이 훨씬 중요하다. 에르메스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분류된다.

현재 아노에겐 경쟁자가 두 명 있다. 구찌·이브생로랑 등을 보유한 프랑수아 앙리 피노(49) 프랑스 PPR그룹 회장, 주얼리 브랜드 카르티에 등을 소유한 요한 루페르트(60) 스위스 리치몬트 회장이다. 세 사람이 세계 명품 시장을 삼분(三分)하고 있다. 아노가 에르메스를 지배하게 되면 명품 세계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판도다. 에르메스는 아노가 놓쳐서는 안 되는 먹잇감인 셈이다.

로이터통신은 “아노가 M&A 귀재지만 에르메스 포획에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이달 10일 내다봤다. 에르메스 가문 사람들이 압도적인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늙은 사자가 아프리카 영양의 일종인 톰슨가젤이 잽싸게 이리 뛰고 저리 내달리는 바람에 잡지 못하고 힘만 빼는 풍경이 명품 업계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VMH 내부에서 아노는 아주 세심하게 디자인을 점검하기로 유명하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는 휘하 디자이너들에겐 꼬장꼬장한 총수다. 거대 명품 기업을 일궜지만 숲만 보는 게 아니라 나무 하나하나 헤아린다.

그렇다고 그가 예술을 전공한 건 아니다. 그는 공학을 공부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건설회사를 물려받아 부동산 투자회사로 바꿔놓았다. 프랑스 사회당 정권이 들어선 81년 미국으로 이민해 플로리다 지역에서 부동산을 사고 팔았다. 그는 미국 생활 동안 두 가지 것을 얻었다. 종잣돈을 불렸을 뿐만 아니라 들불처럼 달아오른 M&A 열풍 속에서 미국식 기업사냥 기법을 익혔다. 그는 우파정권이 집권한 84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곤 곧바로 명품업체인 피난시에르아가세를 인수했다. 양키식 구조조정을 단행해 크리스찬 디올 등 핵심 브랜드와 자산만 남기고 처분했다. 그리고 87년 이후 연거푸 M&A를 통해 LVMH를 설립했다.

아노가 M&A에 성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99년 예술품 경매회사를 사들였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인터넷 거품 시기에 투자회사를 설립해 닷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돈만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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