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경영자 양성 하청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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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10위, 교역 규모 기준으로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규모를 움직이는 경영자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에 국제적으로 내로라하는 경영자가 얼마나 되는지 의구심이 든다. 훌륭한 경영자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는다. 철저한 경영교육 과정을 거치고 수십 년간 기업에서 실전을 쌓은 뒤 글로벌 기업 경영자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경영자 양성 교육체제가 잘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수한 경영자를 키워내는 첫걸음인 경영대학원(MBA) 과정이 너무나 초라하다.

매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지는 세계 각국의 경영대학원 순위를 매겨 발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 50위권에 드는 경영대학원 수가 미국 32개, 영국 5개, 캐나다 4개, 스페인 3개, 중국 2개, 싱가포르 1개인 반면 우리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세계경제 규모 2위인 일본과 3위인 독일의 경영대학원이 50위 내에 못 들어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11분의 1에 불과한 중국과, 경제 규모가 우리의 6분의 1 수준이고 인구도 300만 명에 불과한 싱가포르가 세계 50위 내에 드는 경영대학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경영대학원의 교수와 학생의 질은 세계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얼마 전 우연히 서울 시내 유명 대학의 경영대학 교수진 프로필을 보니 한국경제사를 전공한 1명의 국내 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학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젊은이라면 꿈에 그리는 세계 각국의 명문 대학 출신이었다. 더욱이 이 학교는 국내 최상위 수준의 우수한 학생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우수한 교수와 학생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세계 50위 내에 드는 경영대학원이 없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 당국의 대학에 대한 갖가지 규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우리 대학에는 대학 설립이나 학생 선발, 등록금 책정 등 교육행정 전 분야에 걸쳐 교육인적자원부의 통제와 지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교육 분야 규제건수가 185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규제건수는 어디까지나 밖으로 드러난 숫자이고, 어느 대학 관계자는 실제로는 규제 때문에 대학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대표적인 족쇄가 등록금과 관련된 규제와 관행이라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대학총장의 재량에 따라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육 당국이 일정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대학이 이에 맞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경영대학원의 등록금은 미국 유명 경영대학원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고, 결국 이렇게 싼 등록금이 우리나라 경영대학원의 부실한 교육을 이끈 것이다.

이제는 학생들도 요즈음 대학가를 도배하고 있는 등록금 인상 반대 대자보를 붙이기에 열을 올리기보다 등록금을 올려 제대로 교육받는 대신 장학금을 늘려 달라는 주장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의학이나 법학 전문대학원에 대해서는 국민적 관심을 가지면서 경제를 이끌고 나갈 전문경영인을 양성하는 경영대학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교육 당국은 적어도 경영대학원에 대한 지원은 못할망정 자율적.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족쇄라도 풀어줘야 한다. 대학에 대한 규제가 심했던 독일과 일본도 이제는 대학의 자율권을 최대한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국가재정만으로 대학을 운영했던 독일도 미국의 명문 사립대를 모델로 사립대학 개혁에 나서고 일본도 대학 운영에 민간 경영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우리는 매년 미래의 경영자를 꿈꾸는 수많은 학생이 경영자 수업을 받기 위해 외국으로 나간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나라는 이렇게 수많은 학생이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자 교육을 받는 하청교육 상태를 지속해야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경제 규모에 걸맞은 경영대학원 체제를 갖춰 경영자의 해외 위탁 생산이라는 오명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하며, 그 첫걸음이 경영대학원에 대한 교육부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