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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 부는 민주주의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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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랍에서는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기 어렵다고 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아랍 문화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아랍의 씨족.부족 사회와 이슬람 사원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1인1표제'가 낯설기만 하다. 이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 공산주의 몰락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변혁의 물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랍 세계가 여전히 '폭정의 보루'로 건재해 왔다는 점을 든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잘못된 선입관이 또 하나 있다. 이 지역에서 투표가 실시되면 잘못된 사람이 선택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사망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유선거를 치렀다. 그들은 테러리즘 대신 적대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을 포용하는 정책을 표방한 마흐무드 압바스를 아라파트의 후계자로 선택했다.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이라크인들이다. 테러리스트들이 투표소를 공격하는 가운데서도 이라크 유권자의 60%가 목숨을 걸고 주권을 행사했다.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도 이보다 높은 투표율이 나온 적이 드물다. 레바논도 민주화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아랍의 작은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쿠웨이트는 가장 폐쇄적인 정치제도를 유지해왔다. 여기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다. 카타르.오만.바레인 같은 나라는 이미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서도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있다. 선거를 한 번도 실시한 적이 없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일단 지방 차원의 선거를 허용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그쳤던 이집트도 자유선거를 거론하고 있다. 사실상 종신제 대통령인 호스니 무바라크는 야당 후보의 대선 출마를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낯설지만 고무적인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전쟁이 가장 큰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에서 실시된 자유선거는 다른 아랍 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주주의가 미국 외교정책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며 이라크 정권교체를 강행한 조지 W 부시대통령의 결정은 옳았는가. 일단은 그의 명예가 회복됐다. 그를 순진하다고 조롱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다고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랍 중동을 곧바로 정복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아랍에는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많은 요소가 결여돼 있다. 중산층도 형성돼 있지 않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실업자와 젊은이를 테러리스트의 무기고가 아닌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경제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폭정의 독재자들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독재자들은 도전을 뿌리치려 할 것이다. 자유를 조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더 많은 자유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슬람 종교지도자나 권력자들은 이들에게 손을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다른 세계를 만들기 원한다면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서방 세계는 아랍의 독재자를 더 이상 지원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정권을 흔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생존이 '정치적 참여'라는 두 단어에 달려 있다는 말을 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요제프 요페 독일 디 차이트 발행인
정리=한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