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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있는 아침 ] - '지렁이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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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우상도 두지 않았다. 팔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나는 구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고행보다는 잠을 선택했다.

최승호(1954~ ), '지렁이의 말'

기어코 나는 네 잠을 깨울 것이다. 네 몸에 엔진을 달고 긴 터널을 뚫을 것이다. 꽃씨를 뿌리고 벌떼를 몰고 올 것이다. 나무를 심고 호텔을 짓고 다리를 놓아 내가 건너갈 것이다. 날개 없는 짐승이여. 나에게도 너처럼 잊을 수 없는, 잠 속으로 더 깊이 달아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래서 상처를 안고 잠든 너를 깨우고 싶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의 눈을 가릴 거대한 장막이 되고 싶다. 고통이여, 시인이여, 장막 뒤에 놓인 우리들의, 탄생의, 유년의, 젊음의, 사랑의, 삶의 상처를 넘어서 가라. 떠나라. 짧고 대담하게.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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