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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토크 14] 명품 대중화의 선봉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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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 회장 [중앙포토]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럭셔리 제국의 황제가 된 시발은 모에 헤네시(MH) 인수였다. 미국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번 돈으로 1984년 사들였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른 브랜드 사냥에 나섰다. 첫 표적은 크리스찬 디올이었다. 당시 34세였던 그는 파산 상황에 직면한 크리스찬 디올의 모그룹 부삭(Boussac)을 인수했다. 그는 이때 미래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향수 부문만 따로 떼어내 키우기로 결정했다. 같이 인수한 기저귀 사업과 직물 분야 사업은 되팔거나 정리했다. 30대에 이미 남다른 경영수완을 보인 것이다.
LVMH란 이름은 1987년 모에 헤네시(MH)와 루이뷔통(LV)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간판급 회사를 사들이는 작업은 역시 쉽지 않았다. 루이뷔통의 전 회장 앙리 라카미르의 저항이 심했다. 결국 그와 경영권을 놓고 법정 다툼까지 벌여야 했다. 이 싸움에서 이긴 그는 라카미르를 밀어내고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어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을 정리하고 새 라인을 짜는 게 가장 힘들었다. 정리해고를 하면서 그는 원성도 많이 샀다. ‘캐시미어 정장을 입은 늑대’란 별명도 이때 얻었다.

아르노는 같은 해 세린느를 인수했고, 88년엔 지방시, 93년 겐조, 94년 겔랑을 잇따라 사들였다. 99년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구치에 향해 적대적 M&A를 시도하기도 했다. 2001년엔 미국의 도나카렌을 4억5000만 달러에 매수했다. 2010년 들어서는 럭셔리 시계 브랜드 위블로를 인수했다.

대부분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되던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은 아르노의 과감한 미국식 M&A에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많은 비난이 따랐지만 결국 그의 손을 거친 브랜드들은 그 전에 비해 시장가치를 훨씬 키울 수 있었다. 그의 최대 공헌은 명품도 대량생산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 명품에 대중화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명품은 가내 수공업으로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래된 이 관행을 깼다. 많이 생산되면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는 과감히 도전했다.

동시에 그는 명품 마케팅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 전까지 명품은 고유의 작은 매장을 통해서만 팔았는데, 그는 여기에도 도전장을 던졌다. 백화점과 면세점으로 매장을 확대한 것이다. 누구든 돈만 가져오면 팔겠다는 의도였다. 명백히 상업적인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고, 덕분에 명품은 급속도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됐다. 루이뷔통 가방이 '3초 백'으로 불리며 도심의 거리를 장악하게 된 것이 바로 그의 공로다.

아닌 게 아니라 기계식 대량 생산 체제에서는 디자인이 획일화될 수 있다. 창의적인 디자인이라 해도 여러 개가 쏟아져 나오면 창의성이 퇴색하게 마련이다. 그는 물론 이런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브랜드를 인수할 때 간부들에게 늘 세 가지 원칙을 주문했다. 1, 히스토리를 통한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가질 것. 2, 그것을 잘 표현하고 화제를 불러일으킬 스타 디자이너를 찾을 것. 3, 품질과 유통을 철저히 관리할 것. 세 가지 원칙이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유지나 엄격한 품질관리나 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똑똑한 인재를 디자인 총괄에 앉히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핵심 원칙에 따라 1997년 영입한 디자이너가 바로 마크 제이콥스다. 1980년대 루이뷔통은 품질은 문제가 없지만 어머니 세대나 들고 다니는 브랜드로 받아들여졌다. 아르노 회장은 이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천재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브랜드의 낡은 이미지를 털어버렸다. 제이콥스가 그런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1995년에는 존 갈리아노라는 재기발랄한 30대의 영국 디자이너를 발탁해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앉혔다. 여기서 능력을 인정받은 갈리아노는 2년 뒤 크리스챤 디올 수석 디자이너로 자리를 옮겼다.

유능한 인재를 외부에서 데려오면서도 그는 자식들의 경영 참여도 허용하고 있다. 그는 모두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한 딸이 LVMH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으며, 인시아드를 나온 아들도 마케팅과 광고 파트에서 아버지를 돕고 있다. 아르노 회장은 만일 경영자가 안 됐다면 피아니스트가 됐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음악이나 예술에 조예가 깊다. 그의 부인도 피아니스트다. 그는 현재 2012년 준공을 목표로 현재 파리 근교에 ‘루이뷔통 미술관’을 짓고 있다. 이 미술관은 스페인 빌바오에 구겐하임 박물관을 설계하고,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맡았다. 우리 돈 약 2000억원을 투자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루이뷔통 창조재단 측은 “에펠탑에 필적할 만한 멋진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창조재단의 활동에 대해 아르노 회장은 “문화적 영향력을 더 넓게 전파하고, 프랑스의 힘도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기업에 머물던 명품회사를 세계적인 럭셔리 산업으로 일궈내 프랑스의 브랜드 가치마저 끌어올리고 있는 거물다운 말이다.

심상복 기자(포브스코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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