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MB와 사르코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한국의 이명박(MB) 대통령과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어느 모로 보나 맞수다. 한국이 프랑스를 맞잡이로 보는 것은 언감생심이겠는데 사르코지가 할 일을 MB가 선점하고 있으니 어쨌든 국제무대에서 그렇게 통하는 듯도 하다. 사르코지가 포도주!로 기선을 제압하면 막걸리!로 응수하고, TGV로 장군을 부르면 KTX로 막는다. 사정이 다급해진 사르코지가 나폴레옹!을 부르면 MB는 이순신!으로 응수할 것이다. 그게 급이 맞는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통할 만하니 우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MB는 아랍으로 날아가 사르코지가 일찌감치 눈독 들인 원전을 빼앗아 왔다. 이후 원전과 고속철도 수주전이 열리는 곳에선 항상 프랑스와 충돌한다. 사르코지가 약이 오른 건 불 보듯 뻔하다.

 들은 얘기다. 지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MB의 막후 교섭이 주효했던지 다음 개최지가 서울로 수렴되었다. 맞수 사르코지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어찌하랴, 강대국들이 MB손을 들어준 것을. 그 사르코지가 또 궁지에 몰렸다. 의회가 연금개혁안을 통과시키자 어지간한 일엔 톨레랑스로 일관하는 프랑스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청장년이면 몰라도 연금의 실질적 의미도 모르는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진압경찰과 맞붙고 있으니 사정이 딱하게 됐다.

 처음에는 서커스단 복장에 오색풍선을 들고 자못 축제분위기를 풍겼던 시위대가 급기야는 조명탄과 화염병으로 무장하기에 이르렀다. ‘연금개혁 결사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은 1968년 드골 정권을 강타한 5월 혁명을 연상시킨다. 그때 대학생과 노동자들은 ‘권력에게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사르트르와 레비 같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검열과 금지를 남발하는 권력에 저항할 의무가 있다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국민영웅 드골은 하야했다. 이번에는 사회적 연대의 촘촘한 합의절차를 건너뛰는 사르코지 방식이 불을 댕겼다. 연금개혁도 짜증스러운데 재벌가와 결혼한 아들, 패션과 음악에 푹 빠진 영부인 브루니, 정치자금 스캔들이 프랑스적 자존심을 긁어댔다. 마침 대선자금 의혹 인물인 에리크 뵈르트 노동부 장관이 개혁수장으로 나서자 ‘톨레랑스’가 ‘레지스탕스’로 바뀐 것이다. ‘불통!’ ‘거짓말!’ ‘부자정권!’이란 외침이 반향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르코지는 국민들의 이런 반응이 서운한 것이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7.7%로, 유럽의회 규정인 3%선을 훨씬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매년 300억 유로(45조원)의 적자에 허덕이는 연금에 손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래세대가 연금혜택을 누리려면 2년 더 일하고 2년 더 늦게 타라는 게 사르코지의 해법이었다. 2007년 우리의 진보정권에서 통과시킨 우파적 해법, 그 과격한 연금삭감과 비교하면 파리의 가을을 이토록 소란스럽게 할 만한 사안도 아니다. 연금이 비교적 후한 프랑스에서 우리처럼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안을 성사시켰다면 아마 분노한 시민들이 파리를 점령해 버릴지도 모른다.

 EU회원국 중 프랑스가 연금개혁 낙제국으로 분류되는 것도 사르코지에겐 변명거리다. 기금조직, 연금연합회, 노사대표 등 몇 겹으로 이뤄진 프랑스적 협약체제 때문에 정권마다 내놓은 개혁안이 원점을 맴돌았으니 정면돌파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에 희망을 거는 사르코지는 단호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3%가 개혁찬성, 70%는 불가피하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국방비삭감, 부자증세라는 해법을 아예 묵살했다는 비난도 들끓는다. 30% 실업률에 시달리는 청년층은 절규한다. 1000유로 임시직 생활을 2년 더 연장하라는 말이냐고.

 서울에 촛불시위가 있었다면, 파리엔 조명탄시위가 있다. 이번에는 국내정치로 통치력 시험을 받게 되었으니 맞수의 조건이 다 갖춰진 셈이다. 시장개방(한·미FTA)과 연금삭감, 양국의 보수리더에겐 너무나 자명한 조치들이지만 모두 독단적 방식이 화근이었다.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비난에 몰렸고, 몰리고 있다. 촛불시위엔 명박산성이 등장했고, 조명탄 시위엔 최루탄과 고무탄이 맹활약 중이다. 그 방패막들은 서울과 파리의 시민들에게 ‘불통(不通)!’이라는 기호를 가슴에 새기게 한다. 이 ‘불통’의 긴 터널을 일찍 통과한 선배 격인 이 대통령은 풀 죽은 상태로 서울로 날아올 사르코지에게 위로의 말을 던질 법도 하다. 지난주 G20경제장관회의에서 한 건 올렸던 그 말, ‘합의 안 하면 비행기 안 띄울 수도…’, 뭐 이런 해법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