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거두리와 청와대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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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손 대표의 귀환은 여당이 이제 본격적으로 긴장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특히, 대선 후보로 운위되는 사람들이 그렇다. 손 대표가 스파링파트너인지 아니면 본선 상대인지를 가늠하느라고 약간 신경이 곤두선 상태다. 여권 선두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는 아버지시대의 강압적 철골 구조를 무너뜨리려 용접공·광부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어쩐지 버거울 것이고, 체급을 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김문수 지사에겐 노동운동판의 선배이자 선임 지사인 그와의 옛 동지의식,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자신의 이미지가 엉켜 영 껄끄러운 상대로 비칠 것이다. 이런 판세에 손 대표가 할 일은 저 멀리 주변부로 밀려난 쟁점들과 집단들을 추슬러 방황하는 진보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가 찾아내려는 ‘잃어버린 600만 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현 정권의 그늘에 숨어 있다.

“이 시대 진보의 정신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함께 잘사는 사회”라고 응답했다. 근대화·세계화를 넘어 이제는 ‘동반자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구축하는 정치노선으로 진보·개혁·중도를 아우르는 삼합(三合)정치를 내세웠다. 동반자사회와 삼합정치는 이론상으론 중도우파적 노선으로 옮겨온 현 정권의 실용주의와 그런대로 대조적인 색채를 띠고는 있다. 그러나 진보의 매력을 회복하려면 정치의 중심축을 어디에 꽂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산층의 밑바닥에서 절대빈곤층 윗부분까지 넓게 분포된 소위 ‘차상위계층’이다. 현 정권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이들, 월소득 200만, 300만원으로 불안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은 줄잡아 1000만 명에 달한다.

차상위계층은 빠른 속도로 현 정권에서 이탈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필자가 행한 서민 대상 인터뷰에서 그런 기류를 확인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야당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진보의 쟁점을 한나라당에 선점당하고도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민주당을 곱게 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어디 아랫사람들 사정을 알기나 하나요?” 이게 현 정권에 대한 공통된 민원이었다. 택시기사는 인상된 LPG가격 때문에 수입이 전혀 오르지 않는다고 했고, 성남에 거주하는 중년의 노동자는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자리가 말라버린 것이다. 서울 한복판 수퍼마켓 주인은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했고, 농민들은 두 배로 뛴 비료값과 삭감된 농업지원금에 거친 불만을 쏟아냈다. 지난여름 유례없는 강우로 망가진 고추밭과 배추밭을 가리켰다. “친서민정책, 그거 말뿐이지요.” 혜택이 체감되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에서 서민 운운할수록 약이 더 오른다고도 했다.

이런 푸념들은 정권마다 반복되는 현상이겠지만, 이들의 하소연에는 주목할 것이 있다. 정부와 여당이 외치는 ‘서민’이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이심전심의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는 지적 말이다. 서민층의 이런 불신 기류는 중산층으로 확산될 기세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인터넷을 뒤지고, 시위자를 연행하고, 광장을 막는 것. 막무가내식 ‘4대 강’ 스타일, 방송을 통제하는 듯한 인상, 그리고 천안함 사태에서 빚어진 은폐혐의 등등. “독재는 아닌데, 뭔가 좀 갑갑해요.” 젊은 직장인의 한탄은 ‘훼손된 민주주의’를 뜻하는 듯했다. 시민의 목소리가, 참여의 욕구가 튕겨져 나오는 갑각류의 단단한 껍데기, 현 정권에 대한 서민의 이미지가 그랬다. 역대 최고의 복지예산을 편성한 현 정권엔 이런 지적이 억울하겠지만, 정권의 그늘엔 소외의 한숨이 젖은 잎처럼 쌓이고 있다. ‘정치는 희망을 파는 직업이다’는 이광재 지사의 말은 인상적이다. 이들은 두고 볼 것이다. ‘공정사회’와 ‘동반자사회’ 중 누가 지친 심신을 달래줄 것인지를, 누가 희망을 지필 것인지를. 청와대로 가는 길은 장애물이 가득한데, 거두리 처사 손 대표는 1000만 명 차상위계층의 청문회를 우선 통과해야 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