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잡힌 외환 정책] 下. 외환 포트폴리오 바꿀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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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 중심지인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는 최근 한국은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하는 '한은 관찰자(BOK watcher)'가 등장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조정 방향을 예측해 금융시장의 움직임에 대비하는 '페드 와처'와 비슷한 투기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라 달러화 비중을 줄이려 해도 한은이 유리벽 속에 갇힌 신세가 되면서 외화자산 운용(포트폴리오)을 바꾸기가 쉽지 않게 됐다. 한은이 국제 외환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르면서 한은의 움직임은 곧 국제 외환시장에서 핫머니와 헤지펀드에 차익 실현을 위한 매매 타이밍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은은 보유 외환의 수익성과 운용 효율을 높이려 해도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커진 한은의 영향력=한은의 움직임이 이처럼 일일이 감시되고 있는 것은 주요 중앙은행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외환 거래를 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이 세계 1, 2위의 외환보유국이지만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일본은 구조적인 대규모 흑자 기조에 따라 달러화가 계속 넘쳐나고 있으나 막대한 경제력 때문에 버티는 힘이 충분하다. 다만 수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할 때만 외환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의 98% 이상을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도 많이 유입되는 달러화 때문에 위안화의 평가절상 압력을 받고 있지만 미국 달러화와의 고정환율제(페그 방식)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중앙은행에서 국내로 유입되는 모든 외환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외환시장 안정이 가능하다.

◆ 외환 어떻게 운용하나=2000억 달러를 넘어선 외환보유액을 한은이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금▶특별인출권▶국제통화기금(IMF) 지분▶외화 등 네 가지 구분을 밝힌 게 전부다. 중앙은행들은 전통적으로 외환 운용 내역을 밝히지 않는다. 중앙은행 가운데 호주중앙은행(RBA)이 유일하게 포트폴리오를 밝히고 있지만 보유액이 300억 달러 수준에 불과해 비교 기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은의 외환보유액을 위탁(아웃소싱)받아 투자 중인 외국계 투자은행(IB)을 통해 대략적인 윤곽만 알려지고 있다.

IB 업계에 따르면 한은은 보유 통화의 65~70%(약 1300억 달러)가량을 달러화로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엔.유로 등으로 분산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달러 표시 통화 1300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은 수익률이 민간투자 예상수익률(연 6%)보다 낮은 미국 국채(연 4.3%)에, 나머지는 미국 주택저당채권(MBS)과 자산유동화증권(ABS).금융채 등에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 국채 위주의 투자 때문에 한은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크게 떨어지고 있다. 한은은 통화 구성 변경을 장기적으로 추진하되 MBS.ABS.금융채 등 비정부채 투자는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손실을 볼 수도 있지만 국채보다 수익률이 1~2%포인트 이상 높아 수익성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쉽지 않은 포트폴리오 변경=한은은 통화 다변화와 운용 효율 제고 방안을 3년 전부터 추진해 왔다. 우선 추가로 늘어나는 외환은 영국 파운드.캐나다 달러 등으로 확대하면서 통화 구성을 다변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한은의 통화 구성은 그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기타 통화로의 투자 확대가 쉽지 않은 것은 일단 달러화의 앞선 수익성 때문이다. 10년물 국채를 기준으로 미국 국채는 최근 연 4.3%로 일본 국채(1.4%)보다 3%포인트가량 수익률이 높다. 따라서 이를 감안하고도 엔화를 보유하려면 엔화가 달러화에 대해 매년 3% 이상 강세를 나타내야 하는데 일본이 엔화 강세를 용인하지 않는 한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

특히 외환보유액이 대외 지급 수단으로 유사시 석유나 원자재.식량 등을 사오는 데 쓸 돈이라는 점에서도 달러화 비중의 축소는 간단하지 않다. 달러화 결제 비중이 80%에 달하는 한국으로선 외환보유액의 달러화 비중도 여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다른 통화 비중을 늘려 가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화 약세 속도를 더욱 부추겨 원화 강세를 초래하는 부메랑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사무인력을 포함해 66명에 불과한 인원이 2000억 달러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는 운용 체제도 포트폴리오 조정의 걸림돌로 지적된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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