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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지도자 시진핑이 피할수 없는 숙제는 인권·민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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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진=변선구 기자]

포스코 명예회장인 박태준(83) 전 총리의 세종로 파이낸스 빌딩 사무실엔 대형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그는 지도를 보면서 “한국은 중국 턱밑의 목젖과 같고, 일본 옆구리의 단도와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과 일본에 급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활달한 정신에서 반도적 숙명론은 찾아볼 수 없다. 박 전 총리는 1992년 이래 중국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왔다. 덩샤오핑(登小平)의 초청을 받아 ‘개발하기 전 서울의 강남’ 같던 허허벌판,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지역을 시찰한 게 그가 중국을 탐구한 계기였다고 한다. 그전부터 박 전 총리는 중국 정부로부터 구멍가게 수준인 제철산업을 포스코처첨 현대화하는 데 협력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받았다. 박 전 총리는 ‘세계의 철강왕’일 뿐 아니라 중국의 권력자들을 직간접적으로 꾸준히 접촉하고 관리해 온 ‘동아시아의 전략가’다.

기자는 12일부터 17일까지 난징(南京)~장쑤(江蘇)성 장자강(張家港)시~상하이를 방문한 박 전 총리를 동행 취재했다. 동아시아의 전략가와 함께 중국의 변모를 관찰하면서 이 거대한 나라를 한국이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5박6일간 10차례에 걸쳐 15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마침 며칠 뒤 중공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출된 시진핑(習近平·57)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 오랜만에 본 중국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14일 장쑤성 포스코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 현장을 방문한 박태준 전 총리(왼쪽). 옆은 전영기 기자.

 “92년부터 18년간 놀라울 정도로 변했어요. 놀라지 않고, 그런가 하면 둔감한 사람이지. 어느 것도 저절로 되는 건 없어요. 1차적으로 모택동(毛澤東 ※박 전 총리는 중국인의 이름을 시종일관 한자식으로 발음했다. 이하 그의 발음대로 적음)의 혁명이 완전히 성공했고, 주은래(周恩來)와 등소평으로 내려오면서 전체주의로 흐르지 않고 시장경제로 간 것 아닌가. 단순히 공산혁명이 아니야. 애국심이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변화는 있을 수 없어요.”

 - 현재 중국 리더들의 자질과 수준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내가 가장 주목하는 건 습근평(시진핑)이야. 덩치가 좀 크데. 중국의 지도자들은 등소평이 일찍이 중국을 되돌이킬 수 없는 근대화로 나아가게 하겠다는 계획 아래 잘 준비시켰어. 강택민(江澤民), 호금도(胡錦濤) 이런 식으로.”

 - 덩샤오핑이 시진핑도 미리 지도자로 준비시켰을까요.

 “나는 그렇다고 보고 있어요. 그 이후는 몰라도 습근평까진 근대화 지도자의 줄을 세워놓았다고 봐.”

 - 그렇다면 상당히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중국 지도층 인사들은 한국 근대화를 포스코가 주도했다고 생각해 많이들 배우러 왔어. 포항·광양·제주도 같은 데를 다녀갔어. 등소평이 근대화 지도자들을 키웠지.”

 - 키신저 박사가 지난 여름 한국에 와서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더 이상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데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가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희생을 요구하면 표 떨어지니까. 세계 민주주의의 한계, 맞아요. 공산주의라 그렇긴 하겠지만 중국의 지도자들은 표를 의식하지 않지요. 포퓰리즘으로 흐르지 않지. 그런 점에서 안정적이고 수준 높은 리더십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어.”

 - 그러면 한국의 리더십은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은 얘기하기 그렇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자기가 먼저 희생을 했어. 나도 포항·광양에서 새벽 5시엔 일어나 현장을 돌았지. 국민들은 지도자가 먼저 희생하면 대부분 따릅니다.”

 덩샤오핑이 박 전 총리를 특별히 주목한 건 78년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방 모델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둘이 나눈 대화의 한 토막.

 ▶덩샤오핑=중국도 한국의 포항제철 같은 현대화된 일관 제철소를 만들고 싶다.

 ▶이나야마=중국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어려울 것이다.

 ▶덩샤오핑=무슨 소리냐. 중국 인구가 10억이나 된다.

 ▶이나야마=10억이든 15억이든 없는 건 없는 거다.

 ▶덩샤오핑=그럼 박태준을 수입하면 될 것 아니냐.

 이 대화록은 이나야마 회장이 당시 기록을 포스코 쪽에 전달함으로써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이후 포스코에 사람들을 보내 제철산업을 벤치마킹했고, 이런 신뢰가 쌓여 92년 박 전 총리를 상하이로 초청해 본격적인 현대화를 요청한 것이다.

 올 들어 중국을 ‘불편한 진실’로 느끼는 한국인이 많아졌다.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그렇다고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된 중국과 척지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중국을 대하는 방법을 물었다.

 - 중국이 커져서 세계가 당황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돌고 움직이는 거요. 모택동의 공산정권이 오래 안 갈 거라고 그랬는데 그 예상이 틀렸어. 중국이란 방대한 힘에 일본은 힘 못 쓰고, 미국은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동아시아는 마치 중국의 1극체제처럼 흘러가고 있고…. 북한 김정일이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왜 중국에 갔겠나. 김정일이 죽으면 북한이 바로 붕괴할 것이란 시각도 있지만, 난 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봐요. 중국이 보호하면 북한은 그대로 갈 수 있는 거요. 동독의 붕괴와는 상황이 달라.”

 -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안보적으로 미국과 동맹관계를 놓치면 안 돼요. 중국 사람과는 더 많이 더 자주 만나야 해. 그들을 아주 잘 알아야 돼. 지금 중국 지도부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 없어. 요샌 중국 사람들 만나기도 힘듭니다. 하도 커지니까. 겸손하게 중국어를 배워야 돼. 그들의 마음을 훔쳐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우리가 1등 국가가 된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까딱 잘 못하다간 비행기 추락하듯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 노벨 평화상 수상 문제로 중국의 인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인권·민주화는 산업화되는 나라가 피할 수 없는 도전이야. 그건 중국의 새로운 책임자가 될 습근평이 풀어야 할 문제일 거요.”

 포스코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가 있는 장쑤성 장자강시에서 박 전 총리는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그의 승용차는 무장경찰차가 선도했으며 왕복 전 차선에서 교통이 통제됐다. 그도 그럴 것이 100만 명이 사는 장자강시의 포스코스테인리스가 지난해 낸 세금은 5000만 달러(600억원)였고, 호황이던 2007년엔 3억2000만 달러(3800억원)를 기록했다.

상하이=전영기 중앙 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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