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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부덴브로크가의 운명에 처한 북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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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정권의 3대 세습을 보면 4대 세습을 거쳐 몰락해 갔던 부덴브로크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가』는 세상이 변했는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몰락해 가는 부덴브로크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토마스 만의 소설 속에서는 19세기 중반 독일의 항구 도시 뤼베크의 거대 상인이었던 부덴브로크가의 부와 권력이 4대에 걸치는 시기에 사라져가는 모습이 전개되고 있다. 가족들은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조부모와 부모의 거대 저택에서 누렸던 호화스러운 생활의 환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환영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했으며, 또 가문이 몰락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환상 속에 사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부덴브로크가의 스토리가 시사하는 바는 세상이 변했는데도 이를 알지도, 인지할 능력도 없는 ‘정신적 질환’의 메타포일 것이다. 바로 3대 권력세습에 투영된 북한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아직 우리식 사회주의의 환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후계로 추대된 아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저에서 누렸던 우아한 생활의 환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의 이런 모습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주체사상으로 변모시켜 김일성교(敎)의 신앙으로 만들면서부터였다. 지금 우리는 이 신앙이 세습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가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계자로 추대된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한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듯이 전체주의적 권력구조에 의해 통제되는 북한사회에서 불안정한 사태가 발생하리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이 그랬고 동유럽이 그랬듯이 전체주의 체제가 무너진 것은 내부의 폭발 때문이었다. 공산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공산주의자 자신들이었다. 북한이 지금 이런 전체주의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선군(先軍)정치를 통해 군부의 충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으로부터 주민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식량만 확보하면 주민들의 불평·불만이 정치적 행동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대안적인 이데올로기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도 거의 없다. 따라서 권력세습은 그 시대착오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금 존립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실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식에 나타난 일사불란한 군사 퍼레이드와 축제 무드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겔이 어디선가 한 말이 떠오른다. “어떤 정당이든 그 실상은 분열이 일어날 때 비로소 드러난다”고. 헤겔의 말처럼 어떠한 정치적 움직임이든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내적이고 외적인 모순의 사이클을 피해갈 수는 없다. 이 모순에 의한 변증법적 분열을 통해 변화는 일어나게 되어 있다. 물론 아직 북한에서 이런 변화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권력이 김정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보다는 여러 사람에 의해 복합적으로 관리되게 돼 있다는 점이다. 권력이 분산되고 제한적이 되는 신호탄일 수 있다. 헤겔이 말한 변화의 실상이 표면만을 살짝 드러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것이 변증법적으로 더 분열해 북한의 변화 모습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지, 아니면 세습의 굴레 속에서 내부 분열의 트랩에 빠져들지 현재로서는 합리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앞섰던 북한이 3대 세습을 거치는 동안 부덴브로크가의 운명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북한으로 하여금 변하는 세상을 인지하고 적응하게 할 것인가이다. 갑작스러운 북한의 ‘불안정한 사태’는 우리에게 재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마인드 세트를 바꿀 정책 지혜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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