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상태서 공론화"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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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국가의 최고권력이다. 그래서 헌법을 수호해야 할 최고권력자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헌법을 고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무리한 개헌으로 국민의 권익이 침해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1987년 개정된 현행 제9차 헌법은 사정이 다르다.

대통령 직접 선출을 요구한 당시 다수 국민의 뜻을 반영했고, 정치권은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헌법이 최고의 약속이지만 신성불가침은 아니다.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하고 국민투표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으면 개헌은 가능하다. 현행 헌법이 헌정 사상 가장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몇 가지 대목은 논란이 돼 왔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비롯, 대통령과 국회의원.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 불일치로 인한 잦은 선거와 이로 인한 국력 낭비 요인 등이다.

통일 문제를 포함한 남북 관계의 변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이런 가운데 개헌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활발히 나오고 있다. 지금이 현행 헌법을 고수할 것이냐, 아니면 고칠 것이냐를, 또 고친다면 어디를 어떻게 고칠 것이냐를 진지하게 논의할 때라는 의견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한번은 걸러야 할 문제라면 결론을 미리 정하지 않은 백지상태에서 공론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뜻에서 중앙일보는 일반 국민과 정치학자들을 상대로 개헌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열린우리당 중진 A의원은 지난주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찾았다. DJ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그에게 DJ는 대통령 단임제의 폐해를 역설했다고 한다. 그는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 DJ의 역할도 있을 것 같다 싶었다"고 말했다.

올 들어 정치권에서 개헌에 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당 내부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던 개헌 논의의 필요성은 이제 야당 원내대표의 국회연설에서까지 공식으로 제기됐다.

◆ 개헌 논의 본격화될까=한나라당 남경필 원내 수석부대표는 27일 "4월 국회에서 중립적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개헌 논의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올해 개헌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켜 나가자"고 한 김덕룡 원내대표의 발언(2일 국회 대표연설)을 보다 구체화한 제안이다.

한나라당이 개헌에 대해 당론을 정한 적은 없다. 하지만 어차피 공론화가 시간 문제라면 능동적 입장에서 풀어가자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28일 있을 이 두 사람과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 김부겸 수석부대표의 회동에서 개헌 문제가 논의될 수도 있다.

여당에선 주로 지도부가 아닌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개헌론이 제기돼 왔다. 2월 임시국회에선 이석현.정장선 의원이 이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고 여당이 야당보다 개헌에 대한 의지가 적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강하다.

거의 모든 소속 의원들이 개헌에 긍정적이다. 지도부가 공개적인 논의를 꺼리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직후 제시한 "2006년 초 논의를 시작해 연말에 마무리한다"는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서다.

정세균 원내대표는 그래서 "올해는 경제 활성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국론 분열을 불러 올 수 있는 개헌 논의를 시작할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라는 모법 답안을 내놓았다. 올 9월 정기국회쯤이면 개헌 논의의 윤곽과 각 당 입장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 어떤 논리와 명분인가=정치권 개헌 논의의 핵심은 대통령 단임제의 개선이다. 현행 5년 단임제에서 미국과 같은 4년 중임제로 전환을 원하는 의견이 다수다. 제대로 일한 대통령에겐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27일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단임제를 '국민에 대한 죄악'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임기를 의원 임기와 같이 4년으로 조정하면 그동안 대선과 총선.지방선거의 엇박자로 인한 '매년 선거'현상을 피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된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함께 선거로 뽑는 '정.부통령제'도 지역구도 타파 명분으로 많이 거론된다. 한 당의 대통령 후보가 호남이라면 부통령 후보는 영남이 맡는 식의 구도다.

여당의 정동영.김근태, 야당의 박근혜.이명박.손학규씨 등 대선 예비주자로 거명되는 인물들 모두 4년 중임 및 정.부통령제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최근 여야 간 합의가 이뤄진 신행정수도 청사진도 개헌 논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49개 정부기관이 공주.연기로 옮겨지면 분권형 국정운영은 더욱 가속화해 외교.안보와 장기 국정과제는 대통령이 맡고, 일반 행정 등 내치는 총리가 맡는 '이원집정부제'주장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개헌문제가 공론화되면 권력구조 조항뿐 아니라 남북관계 및 통일 관련 조항을 손질하자는 목소리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부분은 노선별로, 또 정당과 정파 간 견해차가 적지 않아 논란이 거셀 전망이다.

그러나 1987년의 직선제 개헌 때와 같은 국민적 요구가 지금은 없고, 대통령 단임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깰 때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개헌 논의의 앞날은 예측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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