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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부부가 만든 인간극장 드라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8호 31면

10년 전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에 등장한 어느 주말부부의 이야기가 방송국 게시판을 달구며 화제를 낳은 적이 있다. 직장 문제로 주중에 남편은 서울, 부인은 지방에 떨어져 살다 주말에 재회하는 가난한 부부의 치열한 생활고를 그린 것이었다. 애초 관전 포인트는 아이 셋 중 둘을 서울에서 직접 키우던 아빠의 육아일기였다. 그런데 더 나아가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대목은 육아일기 필자의 직업이 판사라는 데 있었다.
이런 리얼 드라마는 인간미 넘치는 애틋한 사연들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그 사연은 그냥 감동만 하고 있기에는 마음이 그리 편치 못했다. 게시판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다채로운 반응들 때문이었다. 필자의 직업의식에서 나온 긴장감도 한몫했을 게다.

게시판에선 뜨거운 논쟁이 계속됐다. 첫 논란은 다소의 음모론으로 출발했다. 한 시청자는 “이 드라마는 각본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판사가 이리 못살 리 없다는 뜻이었다. 필경 그는 서울 강남 부자 동네에 살 것이 분명한데 일부러 빈한한 세트장을 꾸며 놓고 연극을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시청자는 서민 중심의 인간극장에 주인공 직업이 판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도무지 정서적으로 이유 없는 거부감이 든다는 극단의 주장에 대해 동조자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거웠다. TV에 궁색한 살림살이를 들고 나와 무슨 이런 소리를 다 듣나 싶어 주인공을 향해 원망감마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침묵하던 다수의 시청자가 “여보세요, 왜 이러세요. 저 판사 때문에 손해 본 일 있나요. 첫 방송인데 좀 보고 나서 합시다”는 논조의 글들이 계속 올라왔다. 이제 음모론자나 비호감주의자들의 격한 주장은 조금 잦아든 듯싶었다. 드라마가 회를 거듭하면서 이어진 논쟁의 주제는 점점 진지해졌다. 일단의 시청자들이 “판사가 격무라던데 저렇게 가사·육아에 매달려 쩔쩔매면 판사 일은 제대로 하겠나?” 걱정했다. 기실 가정사 만사 다 제쳐 두고 재판만 전념하기에도 늘 쫓기기만 하는 것이 판사 일이다. 많은 시민이 판사에게 주어진 일거리가 그리 녹록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판사들이 성실하게 일하지 않을 때 생기는 위험을 꼬치꼬치 지적해 내셨다. 제대로 하라는 질책의 게시글을 열 때마다 마음이 뜨금뜨끔했다. 그래도 이 일의 중요함을 알아 주시니, 격려로도 다가와 가슴 뭉클했다.

그런데 여기에 예리한 반론이 출현한 것이다. 기왕의 논점은 남자 주인공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었다면 반론은 옹호론이었다. 한 시청자는 ‘부잣집에 장가 가서 어려운 일 모르고 사는’ 판사보다는, 생활고에 치이고는 있지만 번사에 고심하는 주인공 판사에게 차라리 재판을 받겠다는 주장이었다. 판사가 인생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어찌 재판을 한다는 말인가. 이 주장에 다수의 누리꾼이 동참했다. 시민들은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생활하는 사람을 그들의 판사로 삼고 싶은 것이다. 고고히 높은 법대 위에 유리돼 짐짓 점잖은 체한다고 한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시대에 진입했다. 공정한 사회에 대한 갈망과 자각의 시대. 다른 부류에게 우리 생명과 신체·재산을 지켜보라고 맡겼을 때 험하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이제 모두들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사사로이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누군가 또는 어딘가와 나눌 수 있는 방향으로 곧게 나가는 태도나 현상’. 공정(公正)이라는 한자 단어를 순전히 어의적으로만 접근할 때 가능한 뜻풀이 중 하나다. 판사라는 직업의 생명이 공정함에 있거늘, 어느 한편에 치우쳤다거나 내 이익에 열중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외관을 갖추기조차 힘이 벅차다. 게시글 지적의 엄중함에 모골이 송연했다. 초임판사인 주인공은 틀림없이 좋은 판사로 성장할 것이라는 데 누리꾼 의견이 점차 모이는 듯했다.

이어 누리꾼들의 예리한 화살의 시선은 여자 주인공을 겨냥했다. 전업주부 대 직업주부의 논쟁. 치열했지만 격조 있는 논란 속에서 진행되던 드라마 일주일은 그렇게 끝맺음 됐다.

10년 전 그 인간극장의 게시판은 성숙한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집단지성이 전문가 직업인의 인생에 중요한 일깨움을 준 교육장이었다. 인터넷상의 과열 논란이 심심찮게 사회 문제로 되고 있다. 좋은 공부거리를 공유할 수 있는 장터가 수시로 열리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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