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테마별 고전읽기] 자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지난 1월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 친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연구공간 수유 + 너머'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지향하는데, '자유'가 '연합'과 모순되지는 않습니까?" "그 놈의 모순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매일 전쟁이지요." 잠시 웃었지만 분명 대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 의지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간섭받지 않는 것. 이 정도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자유의 이미지일 것이다. 이런 자유라면 확실히 코뮨과 모순된다.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간섭과 제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유를 억제하면서까지 코뮨을 만들었을까. 그러나 이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의 코뮨은 무엇보다도 자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선문답을 하듯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긴장관계에 있는 것은 자유와 코뮨이 아니라 자유와 자유입니다. 자유에 대해서 저는 밀의 '자유론'보다는 베르크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최화 옮김, 아카넷)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시론'에서 베르크손은 자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사실은 자유를 부인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자유'를 말할 때 우리는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는 '자아'를 떠올린다. 자유론자들은 우리가 그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정론자들의 먹이감이 될 뿐이다. 우리가 어느 하나를 택했다면 거기에는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사회적이든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정론자들은 그 이유를 밝힘으로써 우리 행동이 이미 결정된 것이었음을 보이려 한다.

베르크손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차이가 있다면 자유론자들은 행위 이전에 자유를 말했고, 결정론자들은 행위 이후에 그것을 부정한 것뿐이다. 한 쪽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자유를 말하고, 다른 쪽은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그것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유로워야 할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다.

베르크손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란 행위 이전이나 이후가 아닌, 행위 자체의 독특한 색깔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색깔들을 잃어버린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다보면 어제의 해가 오늘의 해와 다르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호나 취향에 따른 선택을 곧바로 자유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물처럼 응고된 삶 속에서의 행동이란 대체로 오랜 타성이나 습속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굳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 자유란 선택이기보다는 능력이다.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자신의 기호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의 자유가 술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 알고 있다. 코뮨이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만난 사람이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난 사람들입니다." 중국 친구에게 나는 그렇게 답했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 + 너머'공동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