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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아빠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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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천공항 출국장. 30대 중반의 남성이 초등학생 아들의 양 어깨를 붙잡고 당부한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라. 영어 하나는 확실하게 익혀라. 아이는 아버지의 말에 연거푸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옆의 주부는 붉어진 눈시울로 부자를 애처롭게 쳐다본다. 하루에도 수십 가정이 '기러기 가족'이 되는 전형적인 광경이다.

지난해 초.중등 기러기 유학생을 비롯해 해외 유학.연수자는 39만명이다. 2003년 35만명보다 13.3% 늘어난 것이다. 조기유학으로 인한 기러기 가족은 5만가구로 추산된다. 이들 유학.연수자가 쓴 비용은 51억4800만달러라고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는 추정한다. 2003년 46억6100만달러보다 10.5% 증가한 것이다. 여기에는 직접 갖고 나간 비용은 빠져 있어 해외로 지출되는 실제 교육비는 훨씬 많을 것이다. 국제교육 수지를 보면 수입 2억6000만달러에 불과해 적자 규모는 48억8800만달러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적자폭이 가장 크다. 유학의 가파른 상승추세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은 부존자원이 빈약한지라 인적자원 육성을 통해 국가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국가 입장에서는 질좋은 교육여건을 찾아 떠나는 유학 행렬에 고마워해야 한다. 설사 돈이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해도 국부가 유출된다고 아우성치고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해외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국내 혹은 해외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국력향상에 이래저래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대학과 대학원 과정 유학생은 더 많아야 한다. 국내 대학의 국제경쟁력은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조사로 60개국 가운데 59위다. 2003년보다는 2단계나 떨어진 것이다. 실력이 형편없는 국내 대학에서 공부해봐야 배울 것도 없는 상황에서 우수 학생의 해외 유수 대학 진학은 당사자나 국가.사회를 위해 백번 옳다.

그러나 초.중등생 유학 탈출의 득실은 따져봐야 한다. 정체성이 채 확립되지 않은 나이의 유학이 바람직한 것인지. 몰려드는 한국 유학생이 미국 학생보다 많은 미국 학교의 교육이 성과가 있을지. 어린 자식을 유학 보내는 어버이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학교수업에 의존해서는 어지간한 대학에는 진학이 여의치 않고, 과외를 시키자니 비용이 엄청나고, 자고 나면 대입제도가 바뀌고, 학생부 조작에다 입시 부정이 다반사니 부모들이 넌더리를 내는 게 당연하다. 부모 입장에서는 국내 사교육비보다 적은 돈을 들여 자식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다면 국제화.세계화 시대에 먹고살 만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법하다.

물론 대학교육까지 해외에서 마친다면 괜찮다. 하지만 중도에 귀국할 경우 국내 적응이 여간 힘들지 않다. 자율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던 외국의 학습 분위기가 귀국 후 주입 일변도로 달라지면서 일탈로 치닫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강남의 한 고교에서 발생한 담임선생의 유학 귀국생 답안지 조작 사건을 보라.

더 큰 문제는 조기유학이 이혼과 재산분쟁 등 가족해체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유학비를 대느라 홀로 남아 심신이 피폐해진 가장의 자살, 해외에서 자녀 뒷바라지 중 탈선의 길을 간 주부의 소식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조기유학의 부작용을 우려하고 세태를 개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국내의 교육여건을 하루 아침에 획기적으로 개선하기는 지난한 노릇이다. 방도는 있다. 교육시장의 빗장을 과감히 풀고 선진국 교육기관의 진입을 허용해 조기유학의 열기를 흡입하는 것이다. 교육 쇄국정책의 포기는 유학비용의 과도한 유출을 줄이고 기러기 아빠의 한도 풀어줄 수 있다.

도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