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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5) 여전사 68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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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시절 팔로군 산둥(山東)종대 조직부장 출신 우중롄(吳仲廉·앞줄 맨 오른쪽)은 친구 쩡즈(曾志·앞줄 왼쪽에서 일곱째)의 소개로 1927년 입당했다. 그는 신중국 변호사 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4인방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최고인민 법원장 장화(江華)가 두 번째 남편이었다. 다들 ‘여자 포청천’이라고 불렀다. 초대 소련 주재 대사를 지낸 왕자샹(王稼祥)의 부인이며 제네바회담을 비롯한 국제회의에 여러 차례 참석한 주중리(朱仲麗·둘째 줄 오른쪽에서 열한 번째)와 중공 부주석 천윈(陳雲)의 부인 위뤄무(于若木·셋째 줄 왼쪽에서 다섯째), 천이(陳毅) 원수의 부인 장첸(張<831C>·둘째 줄 오른쪽에서 셋째)의 모습도 보인다. 앞줄 오른쪽에서 넷째엔 문혁 시절 남편 캉성(康生)과 함께 악명을 떨친 차오이어우(曹<8EFC>歐)가 앉아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들 거의가 6년 후 차오에게 박해를 받았다. 김명호 제공

1960년 7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중공중앙공작회의’가 열렸다. 2년 전부터 몰아닥친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 피폐해진 국내 경제와 스탈린 사후 발생한 국제문제를 토의했다. 1년 전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지방정부 주석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를 대신할 판첸라마와 티베트통일전선 공작방안도 중요한 의제 중 하나였다.

회의 도중 전국부녀연합(全國婦聯) 주석 차이창(蔡暢·앞줄 오른쪽에서 일곱째)과 중공 중앙위원 덩잉추(鄧潁超·앞줄 왼쪽에서 여섯째)는 2만5000리 장정에 참여했던 홍군 여전사들과 여성계 대표를 비롯해 전국의 성(省), 시(市), 자치구(自治區) 제1서기의 부인, 국무원 부장의 부인 등 68명을 따로 소집했다. 모여서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회의를 마친 후 기념사진을 한 장 남겼다.

어느 국가건 간에 단체사진에서는 자리가 곧 서열이었다.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이 한곳에 모이다 보니 자기들끼리의 서열이 분명히 있었다. 남편의 직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앞줄 한가운데 자리는 중앙 감찰위원 양즈화(楊之華)와 협화의원(協和醫院) 의사 린차오즈(林巧稚)의 몫이었다(양은 왼쪽에서 여덟번째, 린은 오른쪽서 여덟번째). 양은 중공 최고 지도자를 역임한 남편 쥐추바이(瞿秋白)가 총살당한 후 코민테른 중국 측 대표로 활동한 정통파 혁명가였고 국제산부인과학회 회장이었던 린은 당대 최고의 난산(難産) 전문의였다.

방직부 부부장 장친추(張琴秋·앞줄 왼쪽에서 다섯째)는 장정 시절 홍군의 유일한 여성 사단장이며 옌안 항일군정대학의 생도대장을 역임한 군사가였다. 매탄공업부 당서기 자오스란(趙世蘭·앞줄 오른쪽에서 다섯째)은 학생 시절 루쉰(魯迅)을 분노케 했던 여사대 사건을 주도했다. 중공 초기 지도자의 한 사람인 자오스옌(趙世炎)과 전쟁 시절 전시보육원 설립자 자오쥔타오(趙君陶·전 총리 리펑의 모친)의 큰누님이었다.

덩샤오핑 당시 총서기의 부인 줘린(卓琳·앞줄 맨 왼쪽)과 국가주석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앞줄 왼쪽에서 셋째) 사이에 자리한 중앙 기율위원 장루이화(張瑞華)는 17세 때 광둥 코뮌에 참가할 정도로 겁이 없었다. 원수 녜룽전(<8076>榮臻)이 남편이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이 자리에 끼지 못했다. 장정에 단 한발자국도 참여하지 못했고 당시 직위가 문화부 처장에 불과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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