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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바나나는 풀이다, 선악과다, 슬픈 역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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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바나나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이마고
356쪽, 1만5000원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라면 의아해 할 이들이 많겠다. 지금이야 지천으로 널렸으니까. 하지만 8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이국적 풍미에 값도 만만치 않아 보통사람들은 병문안 갈 때 등 특별한 경우에만 접하는 과일이었다.

그런데 이 바나나에 관한 역사적·과학적· 경제적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자, 예를 들어보자. 바나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니다. 풀이다. 따라서 씨앗이랄 게 없다. 꺾꽂이로 번식하는 장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또 다른 바나나를 얻는다. 이미 아는 사실이라고? 그렇다면 바나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과일이며 전체 농산물로 따져도 밀·쌀·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로 생산량이 많다는 사실은 어떤가.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편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널리 알려진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란 꽤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태어났듯 바나나도 무성생식으로 번식한다. 성경 원본 어디에도 선악과가 사과라는 언급은 없다. 구텐베르크판 성경에서 ‘선악’과를 뜻하는 라틴어 ‘malum’이 사과를 뜻하는 ‘melon’의 파생어와 철자가 같아서 생긴 오류라고 한다. 분류학의 아버지인 린네도 바나나의 학명을 ‘지혜의 바나나’ ‘천국의 바나나’로 명명했다. 근거는 또 있다. 고고학자들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된 지역을 지금의 페르시아 만 앞바다쯤이었다고 보는데 이곳은 사과보다 바나나 키우기에 적합했고 지금도 바나나 재배가 성하다.

바나나가 미국에 전파된 것은 19세기말 빅토리아시대였다. 그때에도 관능적 외설성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여성들이 우아한 자태로 바나나를 먹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마고 제공]

바나나는 산업발달의 일등공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시장에서 과일산업의 선두를 다투는 ‘치키타’와 ‘돌(Dole)’회사 모두 바나나 교역으로 일어섰다. 이들은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대량으로 바나나를 키워, 최초로 냉장 설비를 갖춘 화물선으로 실어날랐으며 전신 전화를 이용해 거래했다. 운반 도중 지나친 숙성을 막기 위해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을 조정하는 CA저장법을 개발했고, 유통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바코드’ 기술에 앞서 숫자코드 기술을 개발했다. 바나나가 혁신 기술과 세계화의 촉매 구실을 한 것이다.

바나나는 또한 국제정치 변혁의 방아쇠가 되기도 했다. 중남미의 농지와 노동력을 거의 공짜로 이용하기 위해 미국의 대기업들은 부패한 현지 독재권력과 야합해 막후에서 노동자 탄압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0년대 과테말라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하던 하코보 아르벤스 민주정권을 축출했고, 이에 앞서1898년 미국과 스페인전쟁 후 쿠바에 처음 상륙한 기업이 ‘치키타’의 전신인 ‘유나이티드 프루트’였다. 그러기에 미국의 작가 오 헨리는 1905년 발표한 단편집에서 바나나 기업과 미국 정부에 휘둘리는 중남미 꼭두각시 정부들을 ‘바나나공화국’이라 이름짓기도 했다.

생명공학을 이용한 품종개량이 진행된 끝에 ‘프랑켄푸드(괴물 프랑켄슈타인과 음식의 합성어)’로 불리는 유전자변형식품의 유해성 논란 중심에 있는 바나나. 바나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쉬우면서도 흥미롭게 다룬 인문·사회·과학책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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