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축구 DNA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40대를 넘긴 세대의 어린 시절은 축구와 고무줄로 성별(性別)이 구분됐다. 남자 애들은 ‘둥근 것은 무엇이든 발로 차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해 축구로 하루를 보냈다. 맨땅의 학교 운동장에서 혹은 동네 골목길에서 책가방이나 벽돌로 골대를 만들어 놓고 고무로 된 축구공을 차댔다. 교실 복도에서도 틈만 나면 헌 수건이나 옷가지를 돌돌 말은 걸레를 축구공 삼아 발재간을 겨뤘다.

반면 여자 애들에게 축구는 금기였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을 미덕으로 여기던 풍조가 남아 있던 때였다. 그러니 온몸을 땀에 적시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뛰어다니는 말괄량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대신 고무줄놀이에 만족해야 했다. 그만큼 축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우리나라에 여자축구의 전통이 없던 건 아니다. 영국식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시기는 1882년(고종 19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호스의 승무원을 통해서다. 그로부터 67년 뒤인 1949년 무학·중앙·명성 3개 여중학교 팀이 출전한 가운데 한국 최초의 여자축구경기가 서울에서 열렸다. 여자농구·여자배구에는 군말이 없었으나 유독 여자축구에는 사회적 반감이 심해 우여곡절 끝에 겨우 성사됐다. 그런 탓인지 한국전쟁 이후 여자축구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세상이 변하는데 축구라고 여성 무풍지대로 남겠는가. 85년 축구협회의 여자축구단이 발족되면서 36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기지개를 켰다. 여자 학교팀과 실업팀도 속속 창단됐다. 하지만 변변한 지원이나 관심이 없어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렀다. 2002년의 한·일 월드컵과 인도계 축구 소녀의 꿈을 그린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은 축구가 남자만의 놀이가 아님을 보여주는 자극제가 됐다. 영국의 여자프리미어리그, 독일의 여자분데스리가, 미아 햄이란 세계적 여자 축구 스타를 배출한 미국의 여자프로축구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우리의 몸에는 ‘축구 유전자(DNA)’가 흐른다고 한다. 신라시대 가축의 방광이나 태반에 바람을 넣어 차거나 던지는 축국(蹴鞠)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저류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얇은 줄을 넘나드는 고무줄놀이도 섬세한 발놀림이 없으면 곤란하다. 17세 이하(U-17) 여자 월드컵 우승은 여성이란 이름 아래 숨죽였던 축구 DNA가 분출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런 기세라면 ‘여자 박지성’이 여자프리미어리그를 휘젓고, 여자분데스리가에서 ‘여자 차붐’이 부는 날이 머지않았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