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Mr. 엔’식 일본 외환시장 개입 성공 못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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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95년 이후 미국의 금융위기가 도래하기 전인 2008년까지 일본 엔화가치는 달러당 110~120엔을 중심으로 100~150엔의 범위에서 비교적 안정된 움직임을 보여 왔다. 이 기간 중에도 일본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을 실시했다. 주로 엔고를 저지하려는 목적이었다. 다만 97~98년은 예외였다. 당시 일본에선 내부 금융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금융 시스템이 불안정해지고 엔화가 급속히 대외신인도를 상실했다. 이때 나타난 일시적인 엔저(低)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는 시장개입을 실시했다.

환율 변동폭의 미세조정이 아니라 방향을 돌리기 위한 일본의 대규모 시장개입은 95~96년과 2003~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95년에는 달러화 강세가 미국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의 주도하에 미국·독일·일본 3개국의 정책당국에 의한 협조개입이 동시에 이뤄졌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통화동맹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달러 강세(Strong Dollar)를 강력히 주도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엔고 저지를 위한 외환시장 개입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개입은 선진 7개국(G7) 정상회의 및 재무장관 회의를 통한 정책협조의 깃발 아래 사실상 미국 주도의 정책 추진에 일본 정부가 연합해 참여하는 형태였다.

이에 비해 2003년 일본은 G7의 협조도 없이, 단지 미국이 묵인해 주는 상황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다. 당시 일본은 수십조 엔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환율방어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은 물론 유럽 쪽의 저항도 예상되는 등 아주 어려운 시장과의 싸움이 예상된다. 설령 대규모의 자금을 투입해서 시장개입을 하더라도 일본 혼자 힘으로는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전에 장기적으로 유지됐던 달러당 110~120엔 수준으로 엔화가치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세계경제 및 통화안정을 위한 정책협조란 명분하에 탄생한 G7에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 참여하고 기여해 온 일본은 지금 G7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웃나라 일본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한다. 먼저 지금과 같이 미국과 유럽 등이 경제의 활력을 상실하고 있는 시기에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가에서 일본의 ‘미스터 엔’처럼 함부로 자국 통화의 강세 필요성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현실적인 일인지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국가 간의 정책협조라는 명분하에 물밑에서는 언제나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도 실감하게 해준다.

끝으로 일본이 만일 이번 시장개입에 실패할 경우, 이게 오히려 아시아 역내의 통화안정을 위한 본격적인 협력 논의를 가속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반드시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92년 이후 유럽의 통화 통합이 달성된 99년까지 영국·이탈리아·프랑스는 독자적인 외환시장 개입에 대부분 실패했다. 유로는 결국 그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한택수 국제금융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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