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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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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책과함께

354쪽, 1만5000원

냉전 붕괴이후 다시 돌아온 약육강식의 세상을 맞아 또 다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깃발이 지구마을 여기저기서 휘날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역사의 기억'을 둘러싸고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는 극우세력과 이에 맞서 타자.타민족과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시민사회 사이에 내전(civil war)이 한창이다.

"한국민중에게 고난의 근원인 38도선이 역사적으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전후 침략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쪽에 섰던 요시노 마코토(吉野誠.57.도카이대 아시아문명학과) 교수의 직필(直筆)은 '자랑스런' 일본 역사 만들기에 나선 일본 우익의 곡필(曲筆)에 당당히 맞선다.

이 책은 20여년 이상 한국사를 연구하고 강의해온 저자가 자기 나라의 과오를 진솔하게 비판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반인도 알기 쉽게 꼭꼭 씹어 풀어놓은 책이다. 일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로부터 1945년 일본 패망에 이르기까지 2000년간 한.일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사귐과 다툼, 주고받은 문화, 그리고 적대와 우호의 감정 등에 관해 다룬 이 책은 저자의 학문세계의 폭과 깊이가 어떠한지 잘 보여준다.

일본민족 형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단일민족설과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지배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낱낱이 밝혀 낸 부분이 인상적이다. 왜구가 고려인과 일본인의 연합세력이었다거나 그 성원의 대다수는 고려민중이었다고 보아 일본사의 영광에 배치되는 해적행위의 책임을 떠넘기는 학설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나, 일본이 몽고의 지배를 받지 않은 이유를 가미가제(神風)의 덕이 아니라 고려 민중의 저항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신선하다. 나아가 임진왜란, 정한론, 그리고 식민지배정책 뒤에는 일본은 인간이면서 신인 천황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이라는 일본 중심주의가 꿈틀거리고 있으며, 이러한 관념이 제국주의라는 근대의 산물이기 보다 '일본서기'와 같은 고대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도 마음에 와 닿는다.

▶ 조선통신사 일행을 축제분위기 속에서 환영하는 에도 시민. 멀리 후지산이 보인다. 1748년 그림. 일본 고베 시립박물관 소장.

사실 이 책은 한.일 두 나라의 역사를 전근대 시대에는 중국중심의 국제질서를 배경으로,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개별 국가 차원의 분석보다는 세계체제를 이루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비대칭적 상호관계 분석을 앞세우는 세계체제론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일본사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메이지 시대 이래의 침략을 미화하는 우파의 일국사(一國史)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식민주의사관에 맞서 해방이후 한국학계가 만들어낸 내재적 발전론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당한 자의 민족주의와 가해자의 그것을 같은 반열에 놓고 매질하는 것은 가혹하지만,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눈에는 황국사관의 친아들인 일본의 자유주의사관이나 그 의붓자식 격인 한국의 민족주의사관이나 모두 근대화 지상주의의 산물로 비칠 터이니 말이다.

허나 일본에서 벌어지는 '기억의 내전'은 이미 국제전이기에, 군국주의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는 한.일 두 나라 시민들은 연대의 손을 맞잡아야만 한다. 원고 상태에서 이미 번역이 기획되고 역자(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와 저자가 5차례나 만나 생각과 지식을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온 이 책이 두 나라 시민이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에 가로놓인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험한 강물을 넘기 위한 첫 번째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리라 믿는다.

허동현<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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