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9) 막바지 추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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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온도가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게 산속의 추위였다. 그럼에도 작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의 몇 배 되는 추위와 아픔이 빨치산에게 찾아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빨치산 부대들은 우리 수색 부대와 가끔 전투를 벌이면서 힘겨운 ‘보급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찌감치 작전 지역 내의 주민들을 대거 소개(疏開)했기 때문에 저들은 식량과 피복을 얻는 데 애를 먹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그리고 토벌대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야 했다. 게다가 지리산 일대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특히 산의 북사면(北斜面) 일대는 눈이 내린 뒤 햇볕이 들지 않아 절벽 끝이 눈에 덮인 경우가 많았다. 적을 쫓는 토벌대의 입장에서도 눈 쌓인 북사면 일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눈이 덮인 바위인 줄 알고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천 길 아래의 골짜기로 떨어져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토벌대에 쫓기는 빨치산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사지(死地)가 자주 나타났다.

1950년 12월 함경남도 개마고원에서 중공군과 장진호 전투를 치른 미 해병 1사단 5, 7연대 소속 장병이 눈길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당시 추위와 폭설은 미 해병을 힘들게 했다. 51년 12월~52년 2월 펼쳐진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도 혹심한 추위와 폭설 속에 진행됐다. 토벌대는 52년 1월 말 막바지 총공세에 들어갔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2기 작전에서 전남과 전북, 충남 도당 유격대의 뒤를 쫓으며 심각한 타격을 입힌 토벌대는 새해 들어서는 작전 방향을 바꿔야 했다. 지리산 주변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던 빨치산이 대거 소탕되면서 일부는 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에는 남로당과 남한 내 빨치산의 정신적 지도자로 떠올랐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이끄는 81, 92사단이 있었다. 경남 도당의 57사단도 그 주변에서 이현상과의 결합을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빨치산의 최대 주력부대였다. 전남과 전북, 충남 도당의 각 빨치산 부대들이 토벌대에 의해 거의 무너져 재기(再起)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리산에 남아 있던 이현상 부대는 이미 뿔뿔이 흩어진 모든 빨치산 부대원들의 새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정보 계통에는 이들 빨치산이 지리산 이현상의 근거지를 향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여러 경로를 통해 올라왔다.

지리산 이쪽에서 섬진강 건너 저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산이 백운산이다. 그곳에는 전남 도당의 사령부가 자리를 새로 틀고 있었다. 지리산의 이현상, 전남 도당의 빨치산을 한번에 훑어버리는 작전 개념이 필요했다.

사령부에서는 작전 계획을 새로 짰다. 마지막 총공세를 벌여야 하는 시점이었다. 지리산을 남북으로 압박했던 1기 작전, 지리산과 그 일대를 동서로 나눠 벌인 2기 작전에 뒤이은 3기 작전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흩어져 산개(散開)한 잔적(殘敵)들을 더 이상 도주하지 못하게 막은 뒤 모두 소탕하는 작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송요찬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을 이동시켜 지리산을 포위토록 한 다음에 백운산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8사단은 야산 지대를 공략하도록 했다. 야산 지역에는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았 다. 그런 방면에 경험이 많은 8사단으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주민들을 포섭하면서 천천히 적을 쫓는 작전을 펼치도록 했다.

8사단은 1월 4일, 수도사단은 1월 6일 아침 6시에 기동(機動)했다. 수도사단은 이틀 동안 지리산 일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지리산 동서남북의 모든 요소에 수도사단의 부대들이 자리를 잡았다. 특히 산이 산으로 이어져 빨치산의 퇴로로 쓰일 수 있는 길목을 강력한 전투부대들로 채웠다. 전투경찰과 예비 부대의 병력도 대거 동원해 수도사단의 작전지역을 크게 보강했다.

이번 작전은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입장에서도 거의 막바지에 속했다. 적은 1기와 2기 작전을 통해 주력이 거의 소탕됐고, 일부는 흩어진 채 지리산과 주변의 야산 지역을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남부군의 이현상 부대와 그 주변에 붙어 있는 적을 와해시키면 작전은 거의 끝을 맺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모든 작전의 초점은 수도사단이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모아져 있었다. 수도사단은 그런 사령부의 관심과 기대를 어깨에 걸친 채 깊은 산속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1월 9일 포위망을 펼친 채 산을 오르기 시작한 수도사단은 22일까지 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수도사단은 이 작전으로 지리산 속의 적을 사실상 모두 소탕했다. 완전히 빨치산을 없앴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적은 이를 통해 거의 소멸(消滅) 상태에 이르렀다. 이현상은 이 작전에서도 살아남지만 부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원만 거느리고 지리산 이곳저곳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깊은 지리산 이곳저곳에 흩어진 적은 수도사단의 예봉(銳鋒)을 피해가지 못했다. 적은 가끔 산발적인 저항을 펼쳤지만 수도사단의 힘찬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그즈음에 펼쳐진 광경이 하나 있다. 엄동설한, 춥고 깊으면서 눈이 내려 온통 흰색으로 뒤덮인 지리산 속에서 벌어진 기이한 풍경이었다. 국군토벌대의 막바지 빨치산 몰이가 어떠한 힘의 균형 속에서 펼쳐졌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광경이었다. 이른바 ‘횃불 작전’이라고 하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전투 장면은 그렇게 생겨났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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