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올해도 묵은세배 받으세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9면

▶ 경북 경주시 양동마을 주민들이 설을 앞두고 마을 웃어른들에게 묵은세배를 하고 있다.조문규 기자

"어르신,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 자네들도 일하느라 고생 많았네. 내년에도 건강하고 하는 일 잘되길 바라네."

지난 5일 오후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민속마을. 이 마을 여강 이씨 문중의 어른인 이석정(80)씨와 이희동(80)씨가 50대 젊은이(?) 4명의 세배를 받으며 덕담을 건넸다.

이들 가운데 월성 손씨인 손덕익(55.양동민속마을 보존관리위원장)씨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난 여름에는 비가 꽤 왔지만 수해를 보지 않아 풍년이 들었습니다. 다 어르신 덕분이지요."

그는 "내년에도 주민이 화합할 수 있도록 마을을 잘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조촐한 술상이 들어왔다. 이들은 술상에 둘러앉아 지난 한 해의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꼽히는 양동민속마을에 '묵은세배'의 풍속이 면면히 이어져 눈길을 끈다. 500여년 전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집안이 대대로 빠뜨리지 않는 세시풍속이다.

묵은세배는 설 하루 전인 섣달 그믐날(음력 12월 30일) 저녁, 집안이나 마을 어른들께 올리는 한 해의 마무리 인사다. 하지만 이날 양동마을의 묵은세배는 마을 이장을 겸하는 손씨가 "추위에 고생하는 어르신들을 찾아뵙자"고 제의해 앞당겨 예를 갖춘 것이다.

주민 이호식(58)씨는 "한 해를 무사히 보낸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은 설 아침의 세배만큼 중요하다"며 "어른과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일깨우는 우리의 훌륭한 전통"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학업이나 직장 일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맨 먼저 챙기는 일이 묵은세배다. 이희창(18.고교 2년)군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묵은세배를 하러 다녀 전혀 낯설지 않지만 친구들은 이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동대 임재해(53.민속학)교수는 "묵은세배는 '세배'라는 세시풍속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가문마다 인사 방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새해를 시작하기 전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 양동민속마을=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손소(1433~1484)가 1457년 이 마을에 들어와 양반촌의 기틀을 닦았다. 이곳 출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이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치면서 손씨와 이씨 가문이 번성했다. 회재 선생은 손소의 외손자다. 두 가문은 문과.무과 등에 100여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회재 선생의 부친 집인 무첨당(보물 제411호)등 23점의 문화재가 있어 1984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됐다. 이 마을에는 손씨 18가구, 이씨 72가구 등 모두 135가구에 37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주=홍권삼 기자<honggs@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chom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