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길 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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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로쏭'을 부른 정희라씨가 광화문네거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지금은 비록 연출이지만 그녀가 콘서트를 연다면 그 무대는뻥 뚫린 거리, 바로 이곳이 되지 않을까.

충북 음성 휴게소 음반 매장에서 만난 이영지(43)씨는 "70.80 노래는 물론,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댄스 음악도 담겨 있어 온 가족이 듣기에 거부감이 없다"고 말했다. "신나게 들을 수 있어 졸음 쫓기에 최고다. 우리 회사 다른 기사들하고 테이프를 서로 바꿔 듣는다. 일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라며 예찬론을 펴는 사람(트럭 운전사 김용열씨)도 있었다. 쭉 꿰고 있진 못하지만 누구나 한두 마디씩은 할 수 있는 음악, 그것이 '길 가요'의 생명력일지 모른다.

글=최민우.남궁욱.신은진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제목을 보면 판매량 보인다

길 가요 음반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마트.하나로.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 마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미성 음반 김흥대 사장은 "최근엔 판매량의 60% 정도가 할인 매장에서 나간다"고 말한다.

귀성 차량이 많은 설 연휴기간은 길 가요 최고 대목. 서울역 롯데 마트는 아예 '귀성 음반'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가격은 CD 두 장을 묶은 한 세트가 대략 7000원선. 누구 것을 사겠다 마음을 정하고 오는 경우가 드문 만큼 음반 제목이 판매를 절대적으로 좌우한다. '짱 트로트' '대박 디스코 메들리' 등 유치하더라도 우선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게 중요하다. 최근엔 '웰빙 트로트 올인'처럼 고급스러운 재킷에 웰빙을 갖다 붙인 게 인기. 가수 여러 명이 함께 부르는 옴니버스 앨범이 많은 것도 전체적인 음반 시장 불황과 비슷하다.

*** CD 한장 녹음 6시간이면 OK

"영수증을 써-어 줄 거야."

"다시. '어'가 음이 떨어지잖아."

지난달 31일 청량리 녹음실. 무명 가수 김영천(42)씨가 4집 음반 녹음에 한창이다. 김씨는 평소 회갑연.야유회.동창회 등 행사를 뛰어 수입을 챙긴다. "연말엔 행사가 많지만 1, 2월과 7, 8월은 이 바닥도 비수기거든요. 그때 음반을 취입하는 거죠."

김씨처럼 음반을 낼 수 있는 길거리 가수는 100명 정도. "기획사에 소속한 가수는 열 손가락이 넘지 않죠. 나머진 500만원에서 1000만원에 이르는 음반 제작비를 본인이 직접 부담합니다. 음반 낸 가수 중 95%는 손해 봐요. 그래도 자기 음반이라고 떡하니 있어야 행사 의뢰가 더 들어오니 할 수 없죠."

음반 녹음은 그야말로 '후다닥' 일사천리다. 스튜디오 대여 비용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CD 한 장에 들어가는 20곡을 녹음하는 데 6시간밖에 안 걸린다.

길 가요는 창작곡보다 기존 히트곡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 나온 지 1년이 넘은 노래는 저작권협회에 인지세만 내면 싼 가격에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신곡. 청량리 녹음실 채수근 사장은 "태진아의 '동반자', 설운도의 '춘자야' 등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노래를 부르려면 곡당 적어도 2000만원은 써야 한다"고 말한다.

*** 콜라텍.카바레 돌며 하루 100곡 열창

지난달 27일 H 성인 콜라텍. 대낮임에도 40, 50대 성인 남녀들로 북적거린다. 이날은 '카바레 음악의 황제' 백승태(55)씨가 무대에 오르는 첫날. 그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백승태씨 전속 출연 관계로 입장료를 2000원으로 인상하니 양해 바랍니다."

20년 넘게 길 가요 인기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백씨의 주업은 업소 공연. 낮엔 콜라텍에서 60곡, 밤엔 카바레에서 40곡 등 하루 100곡을 부른다. "몸으로 때우며 살아야 하는 만큼 체력과 성대 관리는 길 가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다.

무대에서 백씨는 원맨 밴드나 마찬가지다. 그의 양손은 5단짜리 전자 오르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노래를 부르면서 짬짬이 악보를 넘기고 리듬 박스를 조절하는 것도 그의 몫. "2년 전까진 나이트 클럽에도 나갔죠. 신세대 가수 랩까지 불렀다니까요."

*** 애로쏭, 노골쏭, 색시쏭, 홀딱쏭 …

불황인 길 가요 시장에 최근 뜨고 있는 건 삼성 음반이 기획한 '애로쏭' '노골쏭' 시리즈. 4년 전 첫 출시된 애로쏭 1, 2집이 10만 세트가 팔린 데 이어 노골쏭 시리즈도 20만장 안팎의 판매를 기록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비아그라타령' 'Miss리의 남자관계' '모텔이 뭘 하는 곳?' 등. 가사는 더욱 노골적이다. "아빠 것은 그랜저고/니 것은 티코라 했냐/그랜저면 무얼 하노/터널만 들어가면/시동이 꺼져 버리는 걸"(그랜저와 티코)

'색시쏭' '홀딱쏭' 등 아류 시리즈도 이어졌다. 일본어 녹음도 끝내 3월께 일본에서도 출시될 예정이다. 애로쏭을 작사 작곡한 김모씨는 "풍자를 담으려 했다. 완전 창작곡이라 20곡을 만드는 데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라고 말했다. 그는 "숨기고 감춰서만이 능사가 아니다. 에로물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면서도 "내 이름 절대 쓰지 마라. 애들한테 창피하다"고 덧붙였다.

노래를 부른 여가수 정희라(46)씨는 애로쏭이 첫 음반인, 이전까지 철저한 무명 가수였다. 그녀는 "앞에선 저질이라고 욕해도 뒤에선 킬킬 거리고 재미있게 들을걸요. 고상한 척해도 막판엔 뽕짝 한 곡 불러야 분위기 사는 것과 마찬가지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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