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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가 명검(名劍)이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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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4년 9월 14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마친 뒤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딸 근혜 앞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박 대통령은 딸을 보며 "네가 없으면 못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려고 너를 뒀나 봐"라고 했다. "네 어머니는 훌륭했어. 나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도 재산 등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한 적이 없어"라고 했다. 그날은 한 달 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난 육영수 여사에 대한 박 대통령의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진 날이었다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회상한다.

그때 박 대표는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빈 자리(퍼스트 레이디)를 채우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10일 박 대표는 일기장에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드리는 것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고 적었다.

당시 22세이던 박 대표의 꿈은 교수였다. 그래서 대학(서강대 전자공학과)을 졸업한 그해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어머니의 별세 소식도 그곳에서 들었다. 박 대표는 어머니와 영결한 뒤 그 꿈을 버렸다. "당시 어머니의 역할을 성실하게 하는 것만이 어머니의 인생을 영광 되게 하는 것이라는 믿음과 책임감으로 살았다. 바쁜 벌에겐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말처럼 그렇게 그 시절을 보냈다"고 박 대표는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평범한 삶을 동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79년 아버지마저 비극적으로 잃은 뒤엔 오랜 기간 아버지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발자취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80, 90년대 박 대표가 쓴 일기장엔 그때의 고통이 잘 나타나 있다.

'실컷 (아버지에 대한) 왜곡을 벗겨 놓으면 또다시 왜곡을 시작한다. …운명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가야만 할 길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몰아넣는다'(90년 2월 7일).

'항상 폭풍우, 비바람, 번개 등 바람 잘 날 없이 불안하고 위태위태하여 마음 한번 푸근하게 가져보기 힘든 것이 내 운명인가 생각해 본다 '(89년 11월 29일).

그런 그에게 폭풍우는 아직도 몰아치고 있다. 그것은 80, 90년대보다 더 거칠어 보인다. '박정희 시대'의 문제가 언제까지 얼마만큼 파헤쳐질지 모른다. 그에 대해 묻자 박 대표는 "저쪽(여권)이 나를 명검(名劍)으로 만들려고 그러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렇다. 그가 명검이 되면 어떤 칼날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명검이 될 수 있느냐다. 명검은 다른 검과 다르다. 그만의 특장, 즉 독보성이 있어야 한다. 박 대표도 마찬가지다. 이제 왜 '박근혜'가 아니면 안 되는지 보여줘야 한다. 지난해 총선 때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한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때 그는 한나라당 지지세력에게 통한다는 것을 과시했지만 앞으론 국민 다수에게도 통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박 대표는 요즘 민생 챙기기에 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만큼은 그가 제일 낫다는 점을 집요한 실천노력으로 보여줘야 한다. 민생을 그의 브랜드로 만들면 국민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여권이 과거사를 뒤진다고 해서 박 대표가 옛날처럼 고통스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가 국민으로부터 명검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아버지에게 어떤 흠이 있더라도 그의 발목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여권이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할 경우 국민이 모를 리 없으므로 미리 두려워할 까닭도 없다. 그가 걱정해야 할 것은 국민의 눈이다.

이상일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