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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8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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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비 오는 오후 늦게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논산에서 여장을 풀 만한 마땅한 곳을 찾지도 못했고 이리에 가면 환대를 받을 만한 곳이 있어서였다. 광길이의 수첩에 의하면 이리에는 우리보다 한 학년 위인 김덕웅이가 있었는데 당시에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백화점 집 아들이었다. 그는 한때는 여당, 지금은 야당의 중진이다. 물론 그는 어디로 보나 내 벗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요즘 정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야말로 재야의 우리 세대들이 먼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갈라진 것이 팔십년대 중반 무렵이다. 팔십년의 참상을 겪고 나서 각계가 그 무렵에야 겨우 제 정신이 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지금은 작고한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 고희 때에 전국에서 모여들었던 선후배들이 백삼십여 명 되었는데 그때에는 뭔가 세상을 바꾸련다고 기염들이 대단했던 것 같다. 광주 운암동 집의 아래 위층 방과 마루와 심지어는 주방까지 채우고 앉아서 밤새 마시고 회포를 푼 친구들은 그후 다시는 그렇게 모여 앉을 수 없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서 동서로 갈렸고 또한 훨씬 뒤에 삼당합당을 하면서 다시 쪼개지고 명분도 잃었다. 정말 삼국지의 시구처럼 물거품 속에 사라진 뜻과 인걸들이란 말이 실감난다. 어쩌랴, 이게 인생이다. 하지만 세월 속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 남은 벗들도 있고 아주 달라진 사람도 있고 조용하게 잊혀진 사람도 많다.

광길이와 나는 곧 어두워지기 시작한 국도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는데 지나가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이차선의 비포장 국도 양 옆에는 포플러가 거꾸로 박아 놓은 빗자루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어쩌다가 밤길에 마주치는 시골사람들에게 수첩의 지도에 나온 지명을 물으면 으레 팔 한번 휘저어 보이면서 '바로 조오기'라고 대답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오십리 길을 걸었다. 윗옷은 그래도 우비 때문에 젖지 않았지만 바지 아래로는 속옷까지 젖어버렸다. 광길이의 낡은 군화는 그날 드디어 뒤축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국도변의 가난하고 작은 마을을 지나칠 때면 그 어슴프레한 호롱불 빛을 따라 걸어들어가 아무데나 짚더미 위에라도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나는 나중에 고리키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 젊었을 적의 남도 방랑을 떠올리고 그때에 길에서 만났던 집의 갖가지 잠자리들과 낯선 사람들을 생각했다.

김덕웅이는 당시에 얼굴이 하얗고 키도 작은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농담을 하면 곧 귀부터 빨개졌다. 그의 집에 한밤중에 들이닥쳤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고 우선 늦은 밥을 지어 한상 차려 내오던 너그러운 식구들이 생각난다. 우리가 젖은 양말을 벗자 정말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일본식의 그 집 마루에 퍼졌다. 이튿날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는데도 -가만 있자, 비빔밥을 먹었든가- 아무런 기억이 없고 아마도 그가 우리를 역까지 바래다 주었을 터인데도 어째서인지 머릿속에는 그가 담장 너머로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웃었던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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