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석의 Wine&] 고집불통 유대인과 돌투성이 포도밭이 만든 기적, 트리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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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안드레아 프랑케티. ‘이탈리아의 로스차일드’라 불리는 유대인 가문 프랑케티의 후손이다. 배우와 기자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와인 회사를 운영했다. 이탈리아로 다시 온 그는 1990년대 초 돌연 토스카나 남부 사르테아노에 정착했다. 여행을 왔다가 경치가 너무 좋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여기서 발칙한 상상을 한다. 세계 최고 와인을 만들겠다는 것. 사르테아노는 풍화된 바위로 가득하고 토양이 척박해 포도 재배는 꿈도 못 꿨던 황무지였다. 그는 동네 주민들을 고용해 2년 동안 매일 10시간 이상씩 돌을 치우고 밭을 갈았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후 포도밭 컨설턴트를 불렀다. 하지만 “포도 재배는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들었다. 프랑케티는 뉴욕에서 만났던 ‘와인 친구’들을 찾아갔다. 프랑스 컬트 와인 발랑드로의 소유주 장 뤼크 트뉘뱅과 스페인 최고급 와인 핑구스의 오너 피터 시섹이었다. 그들을 통해 보르도 와인 명가 슈발블랑과 오존의 포도밭에서 대목을 공수했다.

대목에서 제대로 된 포도가 열리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는 96년 첫 번째 와인 ‘트리노로’(사진)를 만들었다. 수확량 중 질 좋은 포도 40%만 사용하고 100% 프랑스산 오크통에 숙성시켰다. 주품종은 대중적인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현지 토착 품종인 산지오베제가 아닌 카베르네 프랑. 배짱 좋게 프랑스 보르도의 도매상을 찾았지만 “이렇게 묽은 와인은 팔리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았다. 이듬해 수확 시기를 늦춰 농익은 와인을 만든 그는 다시 보르도를 찾았다. 결국 보르도 와인 시장에서 그는 1병에 8유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품질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듬해부터는 가격이 두 배 이상씩 급등했다. 어느새 이탈리아 최고급 와인 사시카이아보다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이탈리아의 슈발블랑’ ‘토스카나의 컬트 와인’이란 수식어도 붙었다. 99년 미국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프랑케티는 2000년 시칠리아의 활화산 지대 에트나로 건너갔다. 해발 1100m 고지에 포도밭을 조성하고 보르도에서 ‘양념’처럼 사용되던 품종 프티 베르도를 심었다. 파커는 그가 만든 프티 베르도 와인에 만점에 가까운 97점을 던졌다. 프랑케티가 시칠리아 토종 품종으로 만든 ‘파소피시아로’에 대해 영국의 잰시스 로빈슨은 ‘에트나 와인의 뉴 웨이브’라고 치켜세웠다.

프랑케티가 지난달 한국을 찾았다. 기품 있는 외모와 달리 그의 손은 투박한 농부의 모습이었다. 매번 새로운 도전을 벌이는 이유를 묻자 그는 “남들을 따라 해선 성공할 수 없다”며 “세계 최고 와인을 만들겠다는 일념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에게 품종은 도구에 불과했다. 그는 “와인을 진정 좋아한다면 메를로가 몇% 들어갔는지 중요하지 않다”며 “와인은 품종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과 땅을 반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마셔보지 못한 와인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고 한다. 그동안 돈은 얼마나 벌었을까. 그는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천천히 돈을 잃는 비즈니스”라며 웃었다.

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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