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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이 없다 … 자동차 무한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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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자동차 산업의 '국경'이 사라지고 있다.

세계의 차들이 한국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고, 우리나라 차 업체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같은 국경 허물기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격변을 예고하면서 자동차 업체들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 주고 있다. 올해 국내 자동차 생산대수는 3백10만대(추정치).

한국은 양적인 측면에서 전 세계 차의 4.5%를 공급하는 세계 다섯째 생산 대국이다. 생산 규모가 증가하면서 자동차 산업 환경도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과거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수입차는 이제 우리 주위에서 낯설지 않게 됐다. 올해 11월까지 국내에서 팔린 수입차는 모두 1만4천6백56대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 판매대수의 두 배가 넘는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1조8백84억원에 이른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 윤대성 전무는 "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안목이 높아졌고, 경제위기 과정에서 부에 대한 국민의 사고방식이 바뀌면서 수입차에 대한 거부감이 엷어진 것이 수입차 판매 급증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국 시장을 잡기 위한 수입차들의 레이스도 치열하다. 내년 국내에 첫선을 보일 차종은 20여종을 웃돌 전망이다. 중대형 세단 일변도에서 벗어나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컨버터블·스포츠 세단 등 차종이 다양해지고, 가격도 수억원에서 3천만원대까지 골고루 포진해 있다.

BMW와 도요타는 내년 마케팅 비용을 올해보다 두 배 이상 늘리기로 했고, 한국 내 딜러만 뒀던 메르세데스벤츠는 내년 1월 법인을 설립해 직접 시장을 공략한다.

GM·포드·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업체들도 유럽차에 뒤졌던 미국 차의 실지 회복에 나선다. 이밖에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도 대규모 전시관을 마련하고 신차를 속속 선보일 계획이다. 일본의 혼다, 프랑스의 푸조 등도 새로 한국에 상륙할 예정이고, 고급 스포츠카의 대명사인 페라리와 마세라티도 공식 수입된다.

수입차협회는 내년 수입차 시장이 올해보다 최소한 50%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의 생산기지를 인수한 세계 메이저 업체들의 공세도 치열하다. 르노삼성차의 SM3 출시로 격변을 겪은 준중형차 시장은 GM대우오토앤테크놀러지(GM대우차)의 첫 작품 '라세티'로 또 한번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라세티는 지난달 계약 접수를 시작한 지 한달 만에 누적 계약대수가 5천4백여건을 기록하는 등 만만찮은 성적을 냈다. GM대우 군산사업본부 진상범 부사장은 "라세티를 내년부터 월 5천대 이상 생산해 궁극적으로 준중형 시장의 50%를 차지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 한국 시장을 사실상 독점해온 현대·기아차는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현대·기아차는 국내에서 내주는 시장을 해외에서 만회하겠다는 글로벌 전략을 펼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목표로 하는 'GT-5(글로벌 톱 5)'가 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국 시장은 좁다는 인식 때문이다.

현대차 김동진 사장은 "2008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5백만대 생산체제를 갖춰 세계 5위권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글로벌 경영에 나섰다.

현대차는 지난 4월 미국 앨라배마 현지공장 건설에 착수한 데 이어 이달 중순부터는 중국에서 EF쏘나타를 생산한다. 1996년 일찌감치 위에다(悅達)그룹과 합작으로 프라이드를 생산해 온 기아차는 이달 초 합자회사 둥펑위에다기아자동차(東風悅達起亞汽車有限公社)를 설립, 중소형 승용차 '천리마'생산에 들어갔다. 현대차그룹은 2005년께 중국 현지 생산 규모를 기아차 30만대, 현대차 20만대 등 모두 50만대로 잡고 있다.

현대차 그룹 관계자는 "중국은 글로벌 톱 5 진입을 위한 전략기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 시장 공략을 가속하기 위해서는 2008년까지 터키 공장의 생산 규모를 연간 6만대에서 12만대로, 인도 공장을 10만대에서 15만대로 늘릴 계획이다. 현대차는 쟁쟁한 유럽차들을 제치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자동차 부문의 독점적인 공식 후원사로 선정됐다. 유럽 시장 장기 포석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차=싼 차'라는 인식을 벗기 위한 노력도 활발하다. 현대차는 98년만 하더라도 대당 2만달러 안팎의 고부가가치 차량 수출이 전체 수출대수(6만8백7백60대)의 16%에 그쳤으나 지난해에는 39%로 껑충 올랐다.올해는 고부가가치 제품인 EF쏘나타·그랜저XG·싼타페 등의 수출이 전체 대미 수출의 46%를 차지했다.

자동차 산업의 글로벌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만만찮다. 세계 일류업체들과 맞설 수 있는 품질과 서비스의 개선은 당연하지만, 차 산업의 발전과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행정과 규제도 시급히 정비돼야 한다.

서울대 경영학과 주우진 교수는 프랑스 정부가 디젤승용차 장려 정책을 통해 자국 자동차산업의 부흥기를 가져온 예를 들며 "세계적인 기술 트렌드에 맞게 정책이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이 유지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현상 기자

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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