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with] 오형록·현수 부자 '천재 테란'에 한수 배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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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게이머. 컴퓨터 게임을 업으로 삼은 전문가다. 청소년 장래희망 조사에서 1위로 꼽힐 정도로 인기다. 아직 새로운 직업의 출현에 적응하지 못한 어른들은 별 직업이 다 있다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게이머는 프로 스포츠 선수와 다를 게 없다. 타고난 소질과 뼈를 깎는 훈련이 필수조건이란 점이 그렇고,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그라운드나 코트가 대형 모니터가 설치된 무대로 바뀌었을 뿐. 그래서 프로 게이머는 e-스포츠 선수라고 불린다.

▶ 게이머 체험에 나선 오형록(右)씨와 현수군.

▶ 이윤열(右)·이병민 선수와 함께 한 '셀카' 촬영.

▶ 천재의 노하우를 전수 중인 이 선수.

▶ 아들 솜씨를 보며 신기해 하는 오씨.

이번 주 With Week&은 인기 절정 e-스포츠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했다. 행운의 주인공은 오형록(44.경기도 수원시.한국전력 과장)씨와 아들 현수(14.수지중 3)군. "게임 좀 그만해라!" "아빠, 1시간만 더요!"를 외치던 부자가 처음으로 사이좋게 '스타크(스타크래프트)'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천재 테란' 이윤열(21)선수가 버티고 있는 팬택&큐리텔 게임단 큐리어스가 이들 부자의 도우미로 나섰다.

정리=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헉, 당근이죠!"=아빠가 회사에서 휴대전화로 연락을 하셨다. "이윤열 선수 만나러 갈래? 좋아한다고 했잖아." '게임 대회를 구경하러 가자는 말씀이신가 보다'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닌 모양. "중앙일보 이벤트에 당첨돼 큐리어스 선수들이랑 따로 만나게 됐어. 갈래?" 헉! 아빠도 물어볼 걸 물어보셔야지. 지난해 말 가족여행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큐리어스의 팀 버스를 봤을 때 "사진 찍어야 해요! 따라잡아요!"라고 외치던 저라고요. 그때 시속 150㎞까지 밟으셔놓고는. 제 대답은 무조건 "당근이죠(당연하죠)!"

'길드(온라인 게임 동아리)'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니 난리가 났다. "많이 배우고 오라"는 축하부터 "다음 대회 결승에서는 누구랑 붙고 싶은지 물어봐 달라"는 윤열 형에게 할 질문들까지, 말들이 쏟아진다. 부러워할 만도 하지. 윤열 형이 누군가. 무려 15개월 동안 스타크 랭킹에서 1위 자리를 지킨 '전설의 게이머' 아닌가. 잠시 2위로 밀려나 있지만, 곧 1위에 복귀할 거야. 그런 윤열 형을 직접 만나다니 흥분 흥분!

◆ "10분은 버텨야 해!"=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일찌감치 서울 방배동에 있는 큐리어스의 팀 합숙소로 출발했다. 도착하니 오전 11시. 평범한 가정집 안에 들어선 PC방 같은 훈련장이 신기하다. 그런데 우르르 등장한 게이머 형들 모습이 좀 이상하다. 까치집이 앉은 듯한 머리에 퉁퉁 부은 얼굴까지. 갓 깬 모습인 걸. 10시간씩 한다는 단체훈련도 모자라 늦도록 개인훈련들을 한 모양이다. 게이머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형들이랑 기념촬영을 하고 훈련장에 앉았다. 기다리던 윤열 형의 '개인지도 시간'. 그런데 아빠가 한 마디 하신다. "이윤열 선수 공격 10분 이상 못 버티면 다신 게임 못하게 한다." 농담인 줄 알지만, 슬쩍 오기가 발동한다. '내가 스타크 경력 4년에 승률도 7할이 넘는데'. 결국 첫 판에서 죽어라 방어만 해 'GG(항복)'까지 16분을 끌었다. 내가 봐도 믿어지지 않는 선방. 처음엔 "어디 버티겠어~"하시던 아빠도 10분을 넘기자 슬그머니 응원을 하셨다. "잘한다. 아들, 왼쪽에 적이닷!"

그러나 으쓱했던 기분도 잠시. 다음 판에선 공격을 한 게 실수(?)였다. 나름대로 야심찬 변칙공격을 시도했는데, 윤열이 형이 씩 웃더니 기관총 소리를 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버튼 누르는 속도가 떨어질까봐 손목 부상에도 주의한다더니 정말 장난이 아니다. 전멸까지 고작 6분. (이)병민(19.랭킹 12위) 형과도 붙었는데, 역시 GG까지 10분도 안 걸렸다. 프로는 역시 다르구나!

◆ "다음 주말엔 아빠와!"=내가 형들이랑 게임을 더 하는 동안 아빠도 큐리어스 코치님한테 스타크를 배우셨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 하시던 코치님이 입을 떼셨다. "여기서 '미네랄'를 캐세요, 그걸로 '마린'를 뽑으면요…." 설명은 이어지는데 아빠는 마냥 고개만 갸웃거리신다. 땀까지 흘리시는 듯. 결국 코치님이 작전을 바꾸셨다. "여기 반짝이는 게 석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걸 캐서 일단 공장을 지으면, 거기서 병사를 만들 수가 있어요. 그렇죠 그 그림을 누르세요…." 그제야 아빠의 고개가 끄덕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아빠는 결국 제일 쉬운 컴퓨터와의 시합에서도 두 판을 내리 지신 뒤 지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심심풀이 땅콩'일 줄 알았던 게임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신 모습.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다. 의외로 도전적이기까지 하신 걸.

"현수야, 이게 쉬운 게 아니구나. 그런데 배우면 재밌을 거 같다. 주말마다 기술 한 가지씩만 가르쳐 줄래? 앞으로는 같이 하자. 혹시 누가 아니 아빠가 너보다 전략이 뛰어날지?" "좋아요. 그래도 아빠 아무리 연습하셔도 저는 못 이기실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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