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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戰 연구, 우리 시각으로 새로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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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북한과 미국에 대한 인식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갈등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 인식의 중심을 차지하는 역사적 사건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중견학자 박명림 교수(41·연세대 국제대학원·정치학)의 신간 『한국전쟁1950-전쟁과 평화』는 기존 한국전쟁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거의 전면적으로 재 해석하고 있는 묵직한 저술이다. 국내 지식사회 뿐 아니라 외국학계에서도 새로운 논쟁의 출발이 될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박교수의 한국전쟁 해석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I,II』로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을 비판적으로 수정해 국내 진보·보수학계로부터 공세적인 논쟁을 거친 바 있으며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초청강연을 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높은 명성을 얻었던 적이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I,II』가 한국전쟁의 발발을 둘러싼 국내외 논쟁을 다룬 것이라면 이번 책은 전쟁 발발에서부터 1·4후퇴까지 6개월간 한국에서 전개된 치밀한 정치학적·사회학적 연구로 앞선 책의 연작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필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한국전쟁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반성이다. 철학적 성찰 없이는 현재 반공주의와 급진주의,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민족주의와 근대주의 등 전통적 양자대립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따라서 그는 먼 미래 통일 이후의 관점에서, 세계적으로 공인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우리 사회의 갈등의 진앙이었던 한국전쟁을 해석하고자 한다. '미래를 위한 과거'라는 서문 제목이 말하듯이 평화·인권·통일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대립적 인식을 비판적으로 지양한다.

우선 미국 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이자 미국 주류 정치학자들의 견해였던 '제한전쟁론'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에서 발굴한 여러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맥아더가 38선 북진시 '무조건 항복'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한 뚜렷한 정책적 특징이었음을 이들 자료를 통해 밝힌다. 이같은 미국의 의도에도 미국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 국제정세를 밝혀줄 자료를 통해 설명한다.

아울러 한국전쟁이 일종의 혁명의 일환이었다는 수정주의자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한국전쟁은 복합적인 폭력의 교환체제였다고 규정한 그는 미군뿐 아니라 인민군의 학살도 전혀 '민족해방'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통계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반동적 테러와 혁명적 테러를 구분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강조한다. 나아가 수정주의자들이 혁명적 조치로 해석하는 인민군에 의한 토지개혁이 혁명적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이외에도 처음 공개되는 많은 자료들은 한국전쟁 해석을 둘러싸고 국내외 학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지금까지 '보도연맹=좌익' 등식을 부정할 자료 제시가 대표적이다. 이 자료는 좌익의 경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으로 분류돼 사살당한 경우를 보여준다.

박교수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과학'이다. 1천명의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특히 자신의 아들 셋을 우익 테러로 잃은 강내원(당시 65세)이란 농민이 경찰과 군인을 보호해 끝까지 보복하지 않았던 사례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결국 참혹한 전쟁에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과 개개인의 삶을 통해 재구성해보고자 한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 연구에 관한 한 '지적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와다 하루키(도쿄대)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전쟁연구에 비견해 이제 우리는 박교수를 통해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이 사회과학서 한권의 등장이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wjsan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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