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냉전시대 향락공간서 탈지역화 커뮤니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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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이태원은 1980년대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국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떠올랐다.

"냉전시대 외국인 남성들의 유흥공간이던 이태원이 세계적 수준의 탈지역적 커뮤니티로 변하고 있다." 김은실 이화여대(인류학과)교수는 최근 펴낸 '변화하는 여성문화 움직이는 지구촌'(한국여성연구원 편, 푸른사상)에 실린 논문 '지구화 시대 근대의 탈영토화된 공간으로서 이태원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를 통해 예전부터 지금까지 서울 이태원이라는 공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그 공간의 정치적 성격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 강남에 대한 공간 정치학적 분석은 많았으나 이태원을, 그것도 페미니즘 입장에서 분석한 글은 드물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이태원은 지정학적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미군 남성들이 한국 여성을 상대로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매춘과 퇴폐의 공간이었다. 거기서 벌어지는 퇴폐향락.성매애.마약.미군 관련 범죄도 '안보를 지키고 외화를 벌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 공간은 국가의 '통제'까지 벗어날 수 있었으며, 미군의 상대가 되었던 여성들은 냉전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이태원은 80년대 접어들면서 청년들에게 '자유와 이질적인 외국문화를 공급하는 공간'의 역할을 맡았다. 음악과 술.마약을 가깝게 접하던 바(bar) 문화는 권위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를 통해 타인과 차별을 추구하던 문화 엘리트들의 공간이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88올림픽 이후 이 공간의 정치적 성격이 급격히 변한다. 세계화에 어울리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국가가 이곳의 불법과 일탈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공간의 새 주인으로 일반인 신분의 외국인이 등장한다.

김 교수는 최근 이 공간이 세계적 수준의 탈지역화 공간으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게이들이 지니고 있는 국제적 네트워크와 사이버 커뮤니티, 이를 통한 문화적 생산성과 다양성에 주목한다.구체적으로 게이들의 행사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들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탈지역화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공간 정치학에 대한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인식이다. 80년대부터 미국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성매매업을 했던 미스 리, 70년대부터 이 지역을 드나든 미스터 구, 80년대 이곳에서 활동한 미스터 조, 90년대 이후 게이로 이 지역에서 지낸 미스터 G, 부동산업자,짝퉁 생산업자 미스터 성, 그리고 게이와 게이운동가 등을 통해 이 논문은 이태원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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