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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熱河에서 만난 박지원과의 대화:多민족 통치 고민 담긴 황제의 피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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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연암:만나서 반갑네. 연행시 내 나이가 현재의 김교수보다 다섯 살이 적은 44세지만 나는 1780년에 왔고, 또 인생의 대선배이므로 김교수에게 자네라고 해도 되겠지? 무엇보다 내가 남긴 『연암집』과 『열하일기』로 김혈조 교수가 밥을 먹고 있으니 자네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

김혈조:그게 편하다면 도리없지요. 그럼 저는 선생이라 부르겠습니다.

연암:우리가 서로 2세기를 격해 있고 상황 역시 많이 다를 터이니 서로의 시점에서 대화를 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기로 하세.

혈조:선생은 청나라 건륭제의 70수를 축하하는 정사 박명원의 8촌 동생으로서,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북경에 따라온 줄은 알겠는데, 어찌 이전의 사신이 와본 적이 없는 열하를 다 오게 되었나요.

연암:약소국가의 설움이네. 북경에서 망배례(望拜禮)나 할 줄 알았는데, 황제가 열하의 행궁에서 피서하면서 여기 와서 자기 생일을 축하하라고 하니 안 올 재간이 있나.

혈조:일행 중 절반은 북경에 머물렀다면서요?

연암:우리 형님이야 정사이니 꼭 와야 되지만, 나는 자유의 몸이니 북경에 눌러있어도 무방했지. 그러나 전인미답의 열하도 구경하고 싶었고, 인간의 슬픔 중 이국땅에서 하나는 남고 하나는 떠나는 생이별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게야. 그러니 사백여리의 길을 4일 밤낮으로 달려왔지. 하룻밤에도 물을 아홉 번 건너고, 한밤중에 만리장성을 빠져나오는 고생을 했다네.

혈조:당시 체험을 쓴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와'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는 정말 명문장이더군요. 교과서에 번역문이 실려 있어 모두가 읽는답니다. 선생이 당시 건넜던 험한 물은 이제 천이백만 북경 시민의 상수원인 밀운(密雲) 저수지가 되었고, 고북구의 장성 밑으론 자동차 터널이 뚫렸답니다. 선생이 나흘 밤낮을 고생하던 길을 우리는 버스에서 낄낄대고 복숭아를 먹으며 쉬엄쉬엄 네시간 만에 왔답니다.

연암:그래 자넨 이 승덕(承德:열하의 서쪽에 있는 도시)의 열하행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혈조:북경까지 2백50㎞고 강희·건륭 연간 90여년에 걸쳐 만든 피서지로, 황제는 매년 이곳에서 몇 달씩 머물지 않나요. 피서산장은 넓이 5백64만㎡에다 크게 궁궐·호수·산간·초원의 네 영역으로 나뉘는데, 마치 거대한 중국을 축소해 놓은 모습이지요. 그 밖으로 외팔묘(外八廟)가 마치 중국의 변방민족이 중국을 에워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지요. 이 외팔묘는 모두 라마불교의 사원으로 크고 웅장하며, 특히 보타종승묘는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을 재현한 것이라지요.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답니다.

연암:열하에 온 사람으로 그걸 모르는 이가 있나. 명색이 교수라면서 관광 목적으로만 왔구먼. 내가 진정 묻고 싶은 것은 왜 황제가 해마다 열하에 와서 수개월간 머물고, 주변의 몽고족, 티베트·위구르 등 여러 민족의 대표를 초빙해 건물도 지어주고 융숭히 대접하는가 하는 문제야.

혈조:여기 승덕이 한여름에도 28도를 올라가지 않는 피서의 최적지요, 겨울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열하는 세계에서 제일 짧은 강이라는 지리적 특징을 아는 것도 중요한 것 아닌가요.

연암:이 사람이. 아예 가이드로 나서지 그래.

혈조:되놈의 나라에 갈 필요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던 선생 시대의 고루한 선비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연암:그래. 우리 때는 양반이라며 청 지배하의 한족을 멸시하는 태도, 한 줌의 상투로 변발을 멸시하는 태도, 명(明)과 대조적으로 청나라에 오만무례한 태도, 청에 좋은 문장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태도, 한족은 춘추의리를 모른다고 탄식하는 태도 등 다섯 가지 망령된 인물이 있었지.

혈조:지금도 그 같은 5망(妄)이 있긴 하지요. 이에 비한다면 겸손하게 배우려는 저의 자세는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연암:절차탁마야. 지식인의 문제의식은 관광객과는 달라야 하고 거시적이어야 하네. 과시(科試)를 포기하고 울울하게 지내던 나의 답답한 처지로 중국여행은 오랜 소원이었네. 그러나 선후배들의 연행기나 이야기 혹은 토론을 통해 중국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 관광이 목적이라면 굳이 중국에 와서 눈으로 볼 필요는 없었어. 또 북학(北學)만을 위해서 온 것은 더욱 아니야.

혈조:거창한 목적이 있었습니다그려.

연암:빈정댈 일이 아닐세. 우리시대의 세계 중심은 바로 이 중국이 아닌가. 명색 선비라면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사의 흐름을 전망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나의 연행은 바로 천하대세의 전망에 그 목적이 있었네. 내가 중국의 앞선 문화와 물질적 풍요를 보고 이를 적극 배우고 받아들이자 했다고 청조 통치의 동아시아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네. 오히려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진정 청의 통치체제는 해체돼야 한다고 생각했지.

혈조:그래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았나요.

연암:청이 주변국가를 어떻게 통치하고 그 정치적 고뇌가 어디에 있으며, 인민들의 삶은 어떻고, 혁명은 어느 지방에서 일어날 것인가를 살폈네. 그리하여 내가 세계사의 변혁처로 주목한 곳이 바로 여기 열하와 중국의 동남부 지방이네.

혈조:피서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열하에서 주변의 강대한 민족을 무마하고 통치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황제가 이곳까지 왔다는 말이군요. 청의 현실적 고민처이겠네요.

연암:이제 말귀를 짐작하는구먼. 소수민족에 관한 중국의 고민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혈조:잘은 몰라도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현재의 정책을 보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실패한 소련을 거울로 삼는 것 같아요.

연암:내가 밤새 중국학자들과 필담으로 토론한 내용은 지전설(地轉說)과 월세계(月世界)에 대한 것이었어. 종전의 우주론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중세적 사회질서를 합리화함으로써 각 민족은 물론 개개 인민의 숨통까지 조였으니, 이를 한번 뒤집어보자는 것이었어. 자네 시대에도 민족의 숨통을 죄는 국가가 있을 것이고, 그 이론에 매몰돼 자신이 식민지적 학자임을 깨닫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많겠지. 어 서글픈 일이야.

혈조:저도 이번 여행에서 중국의 실정을 꿰뚫어 보기 위해 노력을 안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밤에 일행들 모르게 몇이 작당해 숙소를 빠져나와 밤새 술도 마시며 중국의 현실을 나름대로는 살폈습니다. 개혁개방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8억 농민의 빈곤.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을 생각해봤지요. 선생처럼 인민의 고뇌 속에서 중국을 읽으려 했지만 잘 모르겠습디다.

연암:김교수. 중국, 아니 자네가 사는 세계를 진정 읽고 그 대세를 전망하려는 쪽으로 문제의식을 확대해 보게. 우리 시대에 중국이 세계 중심이었듯 자네 시대에도 세계 중심이 있을 것이니 그곳을 주목하란 말일세. 그러면 중국의 문제도 풀리지 않겠나. 그것이 진정 자네 시대의 신연행록이 될 걸세.

혈조:저도 선생처럼 빼어난 기행문을 지어 인구에 회자시킬 수 있을까요.

연암:글쎄. 나의 경우처럼 금서가 되지 않는다면 내 읽어봄세. 기대하겠네.

연행의 길은 청(淸)의 수도인 북경에서 대체로 끝난다. 더러 열하(熱河)까지 가는 경우도 있으나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열하의 존재를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은 연행록(燕行錄)의 백미인 『열하일기(熱河日記)』다. 그 저자인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필자가 세기를 넘어 마주앉아 대화하는 형식으로 꾸며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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