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 대물림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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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행정자치부는 지난 25일 부패 예방을 위한 '공무원 행동강령안'을 입법예고 했다. 그러나 이 안은 당초 발표된 부패방지위원회의 시안은 물론 1999년에 제정된 '공직자 10대 준수사항' 보다도 더 규제의 정도가 완화된 내용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행자부는 부방위의 시안이 현실과 괴리가 커 실천 가능한 안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공무 집행의 투명성과 공무원의 청렴성을 제고하려던 강령 제정의 원래 취지가 크게 희석됐다는 비판 여론 등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대통령선거를 앞둔 공무원 달래기 용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살 만하다.

그러나 강령의 조문 하나 하나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기에는 한국 사회의 부패 수준은 너무나 심각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02년 국가별 부패지수에서 한국은 코스타리카·요르단·모리셔스 등과 함께 국가순위 40위에 해당한다. 경제규모(GNI)가 세계에서 13째라는 위상과는 걸맞지 않은 순위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대국이 된다한들 부패지수가 높은 한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경제발전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역사상 관료사회가 부패했던 나라 치고 멸망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부패방지위원회도 만들고 관과 민에서 부정부패추방운동도 다각적으로 전개해 왔지만 여전히 구조화된 부패는 척결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기성세대가 만든 부패한 사회구조가 2세 국민들마저 병들게 하고 있다. 기성세대의 부패가 그들에게까지 전염되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부패국민연대와 국제투명성기구 한국 본부가 지난 9월 2일부터 30일 사이에 전국 중·고등학생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의 부패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부패' 라는 전염병이 우리의 2세 국민들을 얼마나 감염시키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조사 대상자의 거의 절반이 "보는 사람이 없으면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약 3명 가운데 한 명꼴로 "뇌물을 써서라도 문제를 기꺼이 해결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자신과 친인척의 부패는 묵인하겠다는 학생이 거의 3분의1에 이르고, 5명 가운데 한 명은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10억원을 벌 수 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다. "부정부패를 목격해도 나에게 손해가 되면 모른 체한다"는 응답률이 35%, 그리고 약 42%의 학생들은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사람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학급과 동료, 회사 내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행위로 칭찬 받아야 한다"는 응답이 약 58%였지만 나머지 학생은 고발한 사람은 왕따가 될 것이라거나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을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심지어 왕따를 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약 6%로 나타났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청소년들을 두고 윤리규범이 타락한 세대라고 한탄할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따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그들이 그렇게 되지 않게끔 기성세대가 모범을 보이려고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해 왔는지를 깊이 반성할 일이다.

그들은 말한다. 한국은 부패사회다. 한국에서 가장 부패한 집단은 정치권이다. 그래서 정치권은 반부패 개혁 대상 첫째로 꼽힌다. 한국사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은 정치권의 부패,인맥,지역주의,학연, 사회문화적 환경,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법이나 제도의 부재 등이다.

그리고 부패를 없애기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부패를 철저히 막을 수 있는 법과 제도의 강화"를 꼽았다. 그들은 이만큼 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사회의 부패가 별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미래를 어둡게 전망한다. 누가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그들을 오염에서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물론 기성세대 모두의 몫이지만 공직자의 솔선수범이 관건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들은 몇백 개의 화려한 공약보다 부패방지책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부패를 대물림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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