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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북방을 향한 로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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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바둑 팀을 이끌고 백두산에 처음 가본 것은 한 20년 전쯤 된다.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이 천지에서 도전기를 둔다는 기획이었다. 아직 중국과 국교가 없던 시절, 천신만고 끝에 백두산에 도착한 날, 하늘은 기막히게 맑았고 천지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그러나 현지 공안은 갑자기 천지 건너편 북한 쪽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항의해서 안 된다”며 백두산 대국을 막았다. 백두산을 내려올 때는 일행의 온몸을 검색하며 만약 나중에 사진 한 장이라도 발각되면 출국을 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사진기자가 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내 구두 뒤축에 필름 한 통을 숨겨 왔는데 검푸른 천지를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채 바둑을 두는 조훈현-유창혁의 사진은 지금도 곳곳에 걸려 있다).

백두산 천지호텔에서 1국을 끝내고 옌지(延吉)에서 제2국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조선족 동포가 구경 왔다. 그러나 어느 틈에 공안이 우르르 들이닥쳤고 중국기원의 초청장을 보여줬음에도 바둑은 불과 8수 만에 종료됐다. 사상 최단명의 도전기였다. “이건 중국의 명령이다”고 공안은 말했다. 그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동포들은 불과 몇 초 만에 썰물처럼 사라졌다. 이 모든 수난은 정말 뇌물을 제대로 쓰지 않은 탓이었을까. 저녁 때 만난 한 공무원의 소곤거림처럼 “중국과 북조선의 50년 의리관계” 탓이었을까. 어쨌거나 누추했다. 북방을 향한 오랜 ‘로망’은 한낱 철부지의 몽상처럼 조각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철이 덜 들어 요즘에도 가끔 임진강 쪽으로 드라이브를 나간다. 적막하게 굽이굽이 흐르는 임진강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파주 프로방스 마을에서 보면 바로 코앞을 흐르는 임진강 건너 북한의 헐벗은 산야가 철조망 위로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그곳 찻집에 앉아 다시 하릴없는 몽상에 젖어 든다. 저 강을 건너 자동차를 몰고 북한 고샅고샅을 누비다가 개마고원을 넘고 압록강 건너 만주로 시베리아까지 내달리는 꿈을 꾼다(고생하는 북녘 동포나 눈물짓는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은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남쪽은 바다로 막혔으니 북쪽으로 가보고 싶은 것은 한국 사람의 DNA고 원시적 욕망일 뿐이다).

국경의 현실이 날로 각박해지니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할 것 같다. 내 손자의 손자들은 서울발 시베리아행 기차를 타고 여름 휴가를 떠날 수 있을까.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