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선택과 레몬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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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까? 자신의 속내를 숨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역선택의 문제가 갑자기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경제적 본능을 갖고 있다. 행여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봐 자신의 진정한 선호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모두가 최선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최악을 선택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역선택이라고 한다. 따라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반대하는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심을 밝히지 않고 엉뚱하게 답변한다면, 오히려 경쟁력 없는 후보가 결정되는 전형적인 역선택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역선택은 우리 일상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중고차를 살 때나, 보험에 가입할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도 역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한 정보를 밝히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현상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자신'은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선택이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은 누군가 부담해야 된다. 역선택의 비용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은 물론 엉뚱한 제3자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가져오는 역설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보험시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험사의 최고 고객은 가입만 해 놓고 보험금을 타가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량고객이라면, 왜 보험에 들려고 하겠는가. 보험회사를 찾는 고객은 스스로 사고의 위험이 높거나, 건강이 걱정되거나, 무슨 이유든 보험금을 탈 가능성이 큰 사람들 아니겠는가. 그래서 보험시장에는 항상 자신의 진실한 정보를 숨기는 달갑지 않은 가입자가 많다. 불량고객을 가입시킬 역선택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은 것이다.

건강검진이나 까다로운 절차도 역선택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은행도 동병상련을 안고 있다. 우량기업은 돈을 빌리려하지 않고, 부실위험이 높은 기업만이 돈을 필요로 한다. 최고가 아니라 최악의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기 쉬운 역선택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금융권의 역선택으로 그동안 얼마나 큰 사회적 부담을 지게 되었는가.

역선택의 비용은 정치권에도 예외일 수 없다. 중고차 시장과 비교해 보자. 누가 좋은 차를 중고로 싸게 팔려고 하겠는가. 시장에는 몇 년식, 어떤 차는 얼마라는 게 널리 알려져 있다. 가격이 뻔하므로 이보다 저급품질의 차량만 매물로 등장하고, 시장가격보다 더 좋은 차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는 사람도 중고차에 대한 과거의 정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싼 값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매매 쌍방이 모두 좋은 제품의 거래를 막아 버리는 속성을 갖는 것이다.

이런 시장을 맛없는 과일에 비유해 '레몬 시장'이라고 부른다. 이 시장에서는 아무리 최고를 선택해도 역시 레몬 밖에는 찾을 수 없는 역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이 바로 레몬시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수록 시장에 진입하는 정치 지망생의 자질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어쩌다 유능한 인재가 출마해도 유권자는 지역감정과 표몰이에 휩쓸려 엉뚱한 역선택을 한다. 정치에 실망한 젊은 계층과 여론 주도층은 아예 투표를 외면하고 있다. 그럴수록 세대교체는 요원하고 역선택만 되풀이되는 악순환이 심화되는 것이다.

모든 게 바뀌어도 정치는 아직도 1970년대의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질 있는 후보가 공급되지 않고, 후보를 뽑는 수요자마저 큰 기대를 안는다면 전형적인 레몬시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장의 속성이 이렇다면, 레몬밖에 없는 곳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보험은 안 들면 그만이고, 중고차 역시 안 사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4류정치의 피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역선택의 비용이 너무나 큰 것이다. 자신의 조그만 이해관계에 얽혀 던진 한 표가, 아니면 쉽게 포기해 버린 한표가 너무나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레몬시장을 사과가 거래되는 시장으로 바꿔 주려면 역시 유권자가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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