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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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르고스(Argos)는 눈이 1백개 이상이나 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그는 눈만 많은 게 아니라 동작이 빠르고 힘도 센 거인이었다. 잠을 잘 때도 항상 두 개 이상의 눈을 뜨고 있어 감시자로서는 그만이었다.

그래서 아르고스는 권력과 사회의 감시자로 '항상 눈을 뜨고 있으라'는 언론에 가장 걸맞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한 대학 영자신문의 제호도 '아르고스'다.

그런데 이런 아르고스의 최후는 비극이다. 그가 1백개 이상이나 되는 눈을 모두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목이 베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르고스의 눈을 감게 한 것은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였다. 당시 아르고스는 헤라의 부탁을 받고 제우스가 유혹하던 여사제 이오를 감시하던 중이었다. 헤르메스는 잠들지 않는 아르고스 때문에 이오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피리를 불어 그를 곯아떨어뜨린 후 목을 베었다.

신들의 사랑싸움에 동원된 아르고스의 죽음은 언론에 권력자의 다툼에 이용되지 말고 항상 눈을 뜨고 있으라는 경구로 다가온다.

요즘 북한에 대한 정책을 놓고 한·미 공조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좋은 이야기다.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상 한·미 공조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공조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확실한 의견·정보·감정의 교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북·미 제네바 합의가 이뤄지기 전, 미국은 우리에게 전혀 알리지 않은 채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계획을 입안했고 강경책을 밀어붙였다. 지미 카터의 방북으로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고 북·미 제네바 합의가 도출됐지 그때까지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고, 한·미 공조도 없었으며, 미국과 북한이 내면적으로 원하던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상황에서 객체로만 밀려나 있었다.

대북 중유지원 중단을 둘러싸고 또다시 소동이 일고 있다. 미국의 목소리와 논리가 높은 가운데 미국과의 이견을 용납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우리의 논리와 정보가 없으며,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를 강제할 외교력을 여론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국력차가 큰 나라와의 공조는 말만 공조일 뿐 실제에 있어서는 방향지시와 압력의 수용,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할 언론이 헤르메스의 피리 소리에 취해 눈을 감아버린 아르고스처럼 눈을 감아버리는 직무유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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