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을 거치면… 전쟁도 농담이 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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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한국전쟁이라고 해서 거창한 이념을 얘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관객들에게 그저 전쟁에 관한 소담한 농담 하나를 건네고 싶다."

이 시대의 이야기꾼 가운데 한 사람인 장진(31)씨가 고향인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주로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2년 만에 풀어놓는 연극 보따리는 '전쟁 팬터지'다. LG아트센터가 2000년 개관 기념작 '박수칠 때 떠나라' 이후 장씨와 다시 손잡고 만든 '웰컴 투 동막골'이 화제의 연극이다.

"동막골은 쉼터다. 거기, 그때, 그 자리…. 그 우매한 곳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라고 지어낸 작은 마을이다. 전쟁에서 이격(離隔)되고 싶은 이들이 소리소문 없이 만들어낸 소박한 파라다이스다. 왜 이런 이 이야기를 하려는지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내가 살 수 있는 동막골을 찾지 못했는데. 뭐 그리 여유있다고 그런 허구를 뽐내며 이야기를 들려주겠는가. 그저, 그냥…."

장씨의 이 말을 종합하면 '웰컴 투 동막골'은 하나의 환상적인 놀이극이다. 연극의 배경은 한국전쟁이 난 직후인 1950년 가을 강원도 오지마을 동막골이다. 전쟁도 이념도 비껴간 이 '중립지대'에 어느날 예기치 않은 틈입자가 나타난다. 국군과 인민군,그리고 미군이다. 동막골 사람들은 이 갑작스런 불청객들을 맞아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야기는 이들이 함께 찍은 기이한 사진 한장을 극 중 '작가'가 이유를 설명하면서 과거로 돌아간 뒤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나오면서 끝난다. 시작과 끝 사이 기나긴 시간적인 공간은 장씨 특유의 수다스런 에피소드와 희극적인 상황들로 채워진다. 장씨는 "이에 대한 연극적인 환영(幻影)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인물 군상들의 성격은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에서나 있을 법한 이런 팬터지를 장씨는 왜 구상한 것일까. 단순히 몽상가적인 그의 기질로 덮어서는 안될 깊은 응어리 같은 게 있어보였다.

"우리는 동시대에 살면서 동세대적인 단절감이 너무 심하다. 이 세대와 저 세대를 웃길 수 있는 소재를 찾아 그 벽을 허물고 싶었다. 동막골은 세상사에 지친 자, 명분없이 세파와 싸우다 자기 삶이 없어진 자들을 위한 이상적인 거처다."

그 배경이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한국전쟁이라는 점은 다분히 '극적'이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세대들에게는 한없는 비극의 세월도 신세대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난해 극단 미추가 공연한 '영광의 탈출'(박수진 작·강대홍 연출)은 한국전쟁을 흑백논리로 바라보는 고정 관념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신세대들의 이야기로 주목받은 바 있다.

극작과 연출을 겸하는 장진은 1996년 소시민의 애환을 담은 '택시 드리벌'로 일약 연극계의 새별로 떠오른 장르 불문의 전방위 예술가다. 호남형의 이미지에다 독특한 작품 세계 극작·연출가이면서도 두터운 매니어 층을 형성하고 있다. 연극 '매직 타임''허탕' 등 문제작을 내는 한편 영화에도 진출해 뚜렷한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영화 '기막힌 사내들''간첩 리철진''킬러들의 수다'를 비롯해 그의 예술 중심에는 늘 뭔가 부족한 사람들과 그들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다. '웰텀 투 동막골'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촌장 역을 맡은 윤주상은 "장진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정형적이지 않은 게 특징이자 미덕"이라며 "보고 나면 예쁜 시 한편을 읽은 느낌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무대에도 예외없이 연극·영화에 줄곧 함께 참여해 온 이른바 '장진 사단' 수다팀이 출연한다. 사단의 리더 정규수를 비롯해 신하균·정재영·임원희, 그리고 바깥 인물로 임하룡(개그맨)·이용이·장영남 등 개성파들이 가세했다.

12월 14∼29일 LG아트센터. 평일 오후 8시, 주말 및 공휴일 오후 3시·7시, 월 쉼. 02-2005-0114.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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