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정약용 … 젊은 사대부들은 ‘운동권’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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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선 후기 신진사대부들의 천주교 수용양상을 되짚어본 최보식씨. [휴먼앤북스 제공]

몇 달 전까지 일간지 인터뷰 전문 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최보식(50)씨가 역사소설 『매혹』(휴먼앤북스)을 냈다. 조선 후기 정조 연간을 배경으로 당시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천주교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발 빠르게 받아들여 ‘주자학의 조선’을 개혁하려다 좌절한 일군의 신진 사대부를 소재로 한 장편이다.

기자 시절, 기명 인터뷰 ‘최보식이 만난 사람’은 거침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실패한 인사’로 지목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사회통합위원장으로 복귀한 고건, 장시 ‘만인보’를 탈고한 고은 시인 등 논란이 일거나 이슈의 복판에 있는 인물이면 누구든 만났다. 질문은 까칠했다. 켕기는 곳을 파고드는 질문에 적지 않은 인사들이 당황했다. 예리하고 집요한 취재와 글쓰기, 소설에서는 어떻게 녹아 들었을까.

소설의 ‘셀링 포인트’는 젊은 사대부들이 천주교를 지금과 같은 종교로서가 아니라 주자학을 대체하는 하나의 정치적 이념체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최씨는 소설의 머리말에서 단언한다. 당시 젊은 사대부는 ‘주자학 시대가 낳은 이념운동권’이었다고. 소설의 두 중심인물인 이벽(1754∼1785)과 정약용(1762∼1836)이 ‘약간의 치기와 무모한 열정에 지배’되는 10대, 20대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을 뼛속까지 받아들였던 대다수의 유생과 천주교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 젊은 사대부들간의 가파른 대립은 정조의 존재로 인해 한층 복잡해진다.

지난해 초 공개된 어찰에서 확인됐던 대로 정조는 정치적 생존을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정적, 노론 벽파와도 손을 잡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조는 실은 정약용 등 기호남인을 후원했다. 소설에는 정약용 등이 천주교와 관련된 ‘사고’를 칠 때마다 정조가 정치적 협상을 통해 죄를 감해주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압권은 사도세자의 복권을 노론 벽파가 반대하는 대목이다. 벽파는 임금 행차가 한강을 건너야 한다는 ‘기술적인’ 이유를 들어 사도세자의 묘 이전을 반대한다. 치명적인 판돈을 걸지는 않은 것이다.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놔 문제를 해결한다. 어쩐지 4대강 사업으로 시끄러운 요즘 정치권에 대한 우회비판으로 읽힌다.

최씨를 전화 인터뷰했다. “왜 하필 지금 서학 무리이고 정약용인가”고 물었다. 거센 경상도 억양의 답이 돌아왔다. “정치적 의도는 없다. 우연히 이벽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된 게 소설을 쓴 계기다. 그는 김대건보다 60년 앞선 자생적인 이념운동권자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 속에 개인으로 죽었다. 순교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연이 가슴에 와 닿았다.”

소설 속에서 정약용은 출세와 천주교 이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최씨는 “다산연구가들에게 몰매 맞을까 걱정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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