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마케팅, 기업 봉사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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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선생님, 무엇을 만들까요?"

"밖엔 눈이 올 것 같은 추운 날씨예요. 이 공을 가지고 눈사람이든 비행기든 여러분들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요. 색칠까지 다 하세요."

29일 오후 3시 30분쯤, 서울 동대문구 안암로타리에 위치한 '용두 희망학교'에선 초등학생 10여명이 올망졸망 앉아 나한나(30)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책상 앞엔 여러 종류의 스티로폼 공과 이쑤시개가 놓여있다.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각자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수학을 배웠지만, 오늘은 미술시간. 대학 때 식품영양학을 전공했고, 지금 CJ푸드시스템에서 메뉴 기획파트 사원으로 재직 중인 나씨는 3주일에 한번꼴로 돌아오는 이 시간만큼은 미술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20여명의 제일제당 직원들이 돌아가며 매일(월∼목)오후 2시간씩 운영되는 이 학교의 선생님으로 활동한다.

용두희망학교는 2000년 7월부터 CJ그룹(옛 제일제당)이 운영하는 야학(夜學)이다. CJ임직원들이 평일 시간을 내서 용두동 등 동대문구의 결손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거나 같이 놀아주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저녁 식사도 제공한다. CJ는 이를 위해 1천5백만원을 들여 옛 파출소를 야학 건물로 개조했고,매년 3천6백만원을 투자하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의 봉사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평일 봉사활동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씨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면서 "보람있고,성취감도 크게 느낀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사회봉사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에서 벗어나 사회적 이미지를 좋게하고, 궁극적으로 기업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비가 늘어나고 있고, 무엇보다 봉사방법이 다양해지는 등 질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다. 시민단체나 사회봉사단체에 돈을 기부하면 어디에 쓰든지 '나몰라라'하던 데서 벗어나 직접 봉사 프로그램을 짜고 직원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직원들이 사회봉사 활동비로 1원을 내면 회사가 1원 이상을 내는 '매칭 기프트'형 기부도 활성화되고 있고, 이왕 기부할 바에 회사의 이미지도 개선하고 매출도 늘리는 마케팅형 기부도 활발해지고 있다. 사내에 별도로 사회공헌 전담조직을 두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직원들에게 유급 휴가를 주거나 고과시 가점(加點)을 주는 등 봉사활동을 장려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일회성'봉사는 이제 그만

기업들은 이제 연말에 한번 성금을 내거나 수재·한해때 수십∼수백명이 우루루 몰려가서 '1회성 봉사'를 하던 데서 탈피하고 있다. 봉사대상자들이 꼭 필요로 하는 봉사활동을 1:1로 제공하거나, 매일 또는 매달 지속적이고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고 있다.

포스코의 아사모('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준말)는 4년여전인 1998년 1월에 결성된 광양제철소 환경에너지부 직원들의 봉사단체다. 처음엔 20명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1백30여명이 가입해 있을 정도로 커졌다. 공휴일 등 쉬는 날에도 봉사활동을 하지만, 평일 퇴근 후 봉사활동도 활발하다. 결식 아동과 무의탁 노인, 치매병원들을 주로 방문해 이들을 돕고 있다. 포스코엔 이런 봉사 단체가 1천5백여개가 있다.

삼성SDS는 7년 전인 1995년 11월부터 소년원 선도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보통신업체에 걸맞게 소년원에 PC를 기증하고,매주 2회 소년원에서 PC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7천5백명이 교육을 받았으며, 이 활동에 참여한 SDS 직원들은 5천5백명이 넘는다. 이를 포함, 삼성그룹은 2천여개의 봉사 동아리가 조직돼 있고, 연인원 30만명이 참여하고 있다. 중견기업인 소망화장품은 95년부터 매년 매출액의 1%를 떼어내 국제기아대책기구와 전문 개안(開眼)병원인 실로암 안과에 내놓고 있다. 99년엔 1%를 더 부담해 북한 어린이 돕기 목적으로 적립하고 있다.

제일제당의 이천공장 임직원 3백여명은 2년여전부터 매일 점심 때면 앞치마를 두르고 무료로 불우이웃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하루 5명씩 참여해, 배식과 설거지까지 한다. 봉사에 휴일이 없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제일제당은 또 매일 홀로 사는 노인 등 빈민층에 도시락을 배달하는 'CJ푸드 뱅크'활동을 하고 있다. 휴일 봉사를 평일 봉사로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만의'봉사 활동을 벌이는 기업들

그동안 돈만 내던 데서 벗어나 회사 고유의 활동을 벌이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한화 건설부문의 임직원들은 지난 6월부터 '마이다스 손'이란 활동을 하고 있다. 매달 영세가정 두 곳을 선정해 도배나 장판, 페인트 등을 새로 단장해주고 있다. 임직원 10명이 매달 참여하고 있고, 실직자 10명도 같이 참여시켜 자활기회도 제공하는 다목적 활동이다.

삼성생명의 보험 설계사들은 보험 계약 1건을 체결할 때마다 1백원씩 모은다. 여기에 회사가 이만큼 돈을 보태 '여성 가장 창업지원'기금을 만들었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었거나 장애인 남편을 둔 여성 가장들에게 창업 자금을 대주기 위해서다. 최고 1천5백만원까지 무상으로 지원하는 이 사업은 지난 5월부터 매월 1명씩을 선정하고 있다.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대교는 올해부터 '세이프 키즈 코리아(Safe Kids Korea)'와 함께 어린이 안전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또 2000년 7월 결성된 눈높이 사랑 봉사단 회원 1만여명이 주축이 돼 '건널목 안전하게 건너기'등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선진국형 봉사활동도 활발

기업들은 이왕이면 회사 이미지도 개선하고, 마케팅에도 도움되는 '선진국형 봉사활동'에도 눈을 뜨고 있다.

LG칼텍스정유는 99년 4월부터 '시그마6 보너스 카드'를 이용한 결식 아동돕기 기금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보너스카드를 소지한 고객이 계열 주유소를 이용하면 일정액을 결식아동 돕기 기금으로 회사가 적립했다가 결식 아동 급식비로 지원한다. 고객들이 많이 주유할 수록 결식아동을 더 돕는 것이니, 회사로선 매출도 늘리고,기업이미지도 높일 수 있다.

소화제 훼스탈의 매출액 일부를 결식아동 돕기 성금으로 내놓고 있는 한독약품이나 자가 주유시 일정액을 기부하는 ㈜SK, 카드 사용액의 일정 부분을 공익단체 등에 기부하는 신용카드회사들의 공익연계 마케팅도 이에 해당한다.

임직원들이 일정액을 봉사활동비로 내면, 그 만큼 또는 그 이상을 회사가 지원하는 매칭 기프트 방식도 활발하다. 한화그룹이 지난 4월부터 모금하고 있는 '밝은 세상 만들기 기금'은 이런 방식이다. 임직원들이 1계좌 5백원짜리를 사면 그만큼을 회사가 내고 있다.6개월동안 벌써 15억원이 모였다.

KTF의 사회봉사단체인 '꿈을 여는 친구들'도 이런 식으로 기금을 모으고 있다. 전 임직원이 급여에서 자동적으로 일정액을 떼어내면 그만큼을 회사가 보태, 이 돈으로 유니세프에 1억원의 후원금을 전달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임직원의 참여를 유도하는 사회봉사 전담조직을 사내에 두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업종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활동해야 봉사대상자들이 오래 기억해 기업 이미지가 더욱 제고된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기업 중 사회공헌활동이 가장 활발한 삼성은 이미 8년 전인 94년 10월 전담조직인 '삼성사회봉사단'을 가장 먼저 설립했다. 이후 이런 기업이 없다가 제일제당도 설립했고, 한화그룹이 올해 신설했다.이들 기업은 대부분 근무시간 중에도 자원봉사활동이 가능하도록 유급휴가제도 실시하고 있다. 봉사활동을 근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상민 수석연구원은 "이미지가 개선되는 등 기업에 보탬이 안되는 사회봉사활동은 오래 가지 못한다"면서 "전담조직을 둬 체계적으로 활동해야 사회공헌활동 비용은 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욱 전문기자

youn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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