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산동네가 그리운 난곡사람들:서로 돕던 이웃 뿔뿔이… 중산층 틈새서 허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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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들에게 재개발은 이별의 다른 이름이다. 정들었던 집, 다정했던 이웃과 헤어져 산 아래 반지하방·옥탑방으로 흘러든 그들은 금세 '빈곤의 섬'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번듯한 주택, 솟아오른 아파트숲에 그들만의 공동체는 이제 없다. 난곡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 때는 날품팔이 정보를 나누고, 아이라도 태어나면 미역이나마 나눴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터득할 수 있는 생존·생활의 기술도 있었다. 그런데 중산층 주택가에 섬처럼 박혀버리면서 이같은 경제·문화네트워크마저 잃어버렸다.

일감을 찾기가 쉽지 않은 터에 집값은 치솟고 물가는 뛰어오른다. 난곡에서의 생존 기술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의 복지정책은 이들의 고통, 재개발의 그늘을 살펴주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재개발과 함께 빈곤층이 중산층과 더불어 살게 되지만 그들 고유의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생존의 기반마저 흔들리게 된다"며 복지와 연계된 재개발론을 제시하고 있다.

◇빈곤의 섬에 갇히고=조순자(가명·45·여)씨는 철거가 진행되던 지난해 난곡에서 내려왔다. 어렵사리 마련한 1천2백만원으로 다세대주택의 반지하 단칸방을 얻어 남편(47), 두 자녀와 함께 입주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5백만원을 빚졌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건설 노동자인 남편이 일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남편과 함께 일을 다니던 사람들이 재개발 뒤 흩어지면서 일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나누지 못해 일감을 못 얻나봐요. "

난곡에는 가끔 소규모 인력시장이 섰다. 봉고차가 와 품팔이 인력을 태우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일감 구하기가 힘들어진 지금 월 1백만원이 넘던 수입은 평균 80만∼90만원대로 떨어졌다. 50만원이 채 안될 때도 있다.

이 돈으로 부채 원리금 16만원 정도를 내고 아이들 교육비를 지출하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다. 가계 적자는 일상화됐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중산층 틈바구니에서 살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졌다. 그녀는 "보고 듣는 것이 달라진 자녀들의 투정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물가는 난곡보다 30%정도 비싸다는 게 조씨의 설명이다.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파출부 일감을 알아보고 있지만 경기 탓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본지와 신림종합사회복지관이 공동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난곡에서 살 때보다 경제사정이 더욱 나빠졌다는 가구가 56%에 달했다.

이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졌고(20%), 부업 연결이 신통찮으며(15%), 공공근로 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기(18%)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역사회의 소속감에 대해서도 10명 중 3명이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웃관계도 네명 중 한명꼴(24%)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이들이 중산층 속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난곡민들의 지출 내역은 평균적인 도시근로자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도시근로자는 식료품비, 교통·통신비, 교육비 순으로 소비지출이 많다. 주거비 부담은 전체 지출액의 3.3%에 불과하다. 반면 난곡민들은 주거 유지비가 44%나 된다. 세금·보험료와 부채상환·이자가 그 뒤를 이었다.

◇기댈 언덕도 사라져=김종연(가명·72)할머니는 무허가 건물 한켠에 자리한 3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혼자 산다. 세간이라야 이불 넣어두는 장롱 하나가 전부다. 창문은 아예 없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하지만 金씨는 전기불을 켜지 않는다. 서울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진 지난 28일에도 金씨는 난방기를 틀지 않았다. 그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한달 수입이라야 기초생활보장제에 따른 정부의 생계보조비 32만원이 전부다. 예전에 난곡에 살 때는 빈곤층 집단거주지역이어서 후원금이나 기부물품도 심심찮게 들어왔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없다.

실제로 설문조사에서도 후원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경우가 11%에 달했다. 金씨는 하루종일 집에서 지낸다.

이금우(가명·73)할아버지는 초등학생 손자·손녀를 키우고 있다. 부인(64)이 골다공증과 허리 디스크로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는데다 최근에는 손녀마저 중이염과 축농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李씨의 월 수입은 정부가 지급하는 생계보조비 60만원뿐이다. 그런데 집을 옮기면서 진 은행빚 4백50만원의 원리금 상환일은 매달 찾아온다. 손자와 손녀는 피아노·태권도학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며 칭얼댄다.

자신도 고혈압과 담낭 이상에 시달리는 李씨는 "4년 전 가출한 아들 내외는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이제는 밥할 기운도 없으니, 저 애들은 어쩌지…"라며 콧등을 훔쳤다.

혼자 사는 노인 등 경제능력을 상실하거나 주위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가 버거운 사람들에겐 재개발이 너무 가혹하다. 비록 세입자대책위원회와 동사무소의 주선으로 방은 겨우 얻었지만 외톨이 신세로 전락한 이들은 "난곡에 살았더라면 신세 한탄을 할 상대라도 있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인지 설문조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생각이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3%에 불과했다.

건국대 조주현(부동산학) 교수는 "도시 재개발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이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고 후원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행자에게 이같은 사회복지 부문까지 부담시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시행자가 부담하면 입주민들의 부담이 그 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한주택공사 서울지역본부 신림사업단 주동근 과장은 "독거노인 등 아주 어려운 사람들의 딱한 사정은 결국 사회안정과 사회복지 차원에서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찬 기자

wolsu@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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