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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의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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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 잡지 기자가 여배우 카메론 디아즈와 인터뷰를 끝내면서 디아즈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했다. 디아즈는 "글쎄요, E=이 도대체 무슨 뜻이죠?"라고 물었고, 곧이어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디아즈는 "농담이 아닌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저서 'E='의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했다.

20세기 이후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 공식은 지구촌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이 짧은 공식으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바뀌었으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탄생했다. 이 공식이 만들어진 해는 대한제국의 쇠망을 불러온 을사조약이 체결됐던 1905년. 꼭 100년 전인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과학사의 지평을 넓힌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로 집약되는 특수상대성이론, 광양자 가설, 분자의 존재를 증명한 논문이다.

아인슈타인에게 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준 업적은 널리 알려진 특수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양자 가설이었다. 빛은 파동이면서 여러 종류의 에너지를 가진 알갱이(광양자)로 이뤄졌다는 이론이다. 음주측정기에 바로 광양자 가설의 원리가 숨어 있다. 음주측정기에 들어 있는 가스가 알코올과 만나면 푸른 가스로 변하고, 에너지가 높은 이 빛의 알갱이가 금속 내의 전자를 튀어나오게 해 혈중 알코올 농도를 알려준다. 아인슈타인은 이처럼 우리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엔은 1905년의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를 '세계 물리의 해'로 정했다. 76세의 나이로 55년 사망한 아인슈타인의 50주기(周忌)도 겸해서다. 아인슈타인의 기일(忌日)인 오는 4월 18일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쏜 레이저 빛을 세계 각국에서 이어받아 지구를 한바퀴 돌게 하는 빛의 릴레이가 펼쳐지는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음주 21일 '물리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각종 이벤트가 예정돼 있다.

요즘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걱정이 많다. 그나마 올해 입시에서는 황우석 교수 덕분에 생명공학부 지망생이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기초과학의 근간인 물리학이 너무 푸대접받는다고 걱정한다. 물리의 해를 맞아 '제2의 황우석'뿐 아니라 '미래의 아인슈타인'을 꿈꾸는 학생이 많아지면 좋겠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