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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안고 돌아온 '80년대 시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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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이제 체면도 없다/새해 첫날 서슴없는 인사말로 당당하다//새해에는 건강하시고/부우자 되시고//말하는 나도, 듣는 사람 그 누구도 모두 웃고 대답한다//부자 되라고 (중략) 자본주의의 나날은/겁도 없이 염치도 없이/내 살 속으로 들어와/유쾌하게 자리잡았다//엉겁결에 나도 덕담 한마디//자본주의여/이제 부자 되셔서/차암 좋컷소"

중견시인 강형철(47)씨가 10년 만에 펴낸 세번째 시집. 1980년대 초 '5월시'동인으로 출발한 강씨는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로 있는등 20년 가까이 줄곧 진보적 문인들의 한가운데 서있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동인 이름을 따 시작활동과 운동을 함께 펼치던 그 시대가 지났음인가, 강씨의 시에는 위 시 '덕담' 일부와 같이 자본주의의 못된 속성에 대책없이 빨려드는 부끄러움이 내비친다.

60년대 초 5·16 쿠데타로 4·19혁명 정신을 앗긴 채 소시민으로 전락해 가던 세대상을 부끄럽게 소묘했던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가을비 내리고 기온도 뚝 떨어지던 지난 21일 저녁 창작과비평사 옆 한 주점에 출판기념회차 문인들이 모였다.

시인 이시영·고형렬·김사인·김정환·이영진·이도윤·이승철씨와 소설가 김영현씨 등 10여명이 모여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지금 진보적 문학 진영의 허리인 이들은 지난 연대 같으면 시국 걱정과 규탄 대책으로 밤 새우며 결연한 문학활동을 펼쳤겠지만 그날 밤은 간간히 '책 잘 나가느냐'는 등 참으로 부끄럽게 일신의 안위만 묻고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이제 나이도 50줄로 접어드는 '80년대 문인'들의 문학과 운동하기의 힘듦을 강씨의 이번 시집은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삶의 나직한, 따뜻한 체온을 전하고 있다.

"음식쓰레기 국물,우리네 인생을 안다며/보도블럭 사이로 스몄고/불 나간 네온사인 곁에서/돌연 가슴들이 알전구로 일어서고 있었어/잠자던 세포들은 온몸의 벽을 두드리고/청계천이 문을 열어 환해졌던가/오래 전에 잊은 누이의 얼굴/생전 제대로 못 나눈 동기간의 우애/피붙이들이 나누는 살가운 미움/가슴으로 오호오호 살아오고 있었지/詩, 네가 나에게로 오던"('명동 계란말이집'중)

서로의 가슴을,진정(眞情)을 오호오호 살갑게 나누는 것이 강씨의 시이고 운동이다. 투쟁의 연대의 시적 전략은 결연함이었으나 이제 시는 따뜻한 웃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씨의 이번 시집에 실린 62편의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위 시 '덕담'도 자본주의에 대한 날선 풍자 혹은 냉소 같지만 죄없이 단순한 웃음으로 읽히며 과거 피아(彼我)의 이분법을 뛰어넘고 있다. 사회적 결연한 의지가 이제 시적 자아로 심화되며 강씨는 다음과 같은 빼어난 시도 얻고 있다. 혹 다시 올줄 모르는 엄혹한 세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시 자체로서의 결연함은 지켜내야할 일이다.

"남산/케이블카/외줄 붙들고/벌벌 기어올라간다//줄 놓치면 세상이 끝날라//밥아 주걱에 달라붙은/밥알 몇개야//남산 케이블카/기어올라가는 외줄//빈집 허청 갈퀴 끝/가로질러 빛나는/한 줄 거미줄의 눈부심."('거미줄'전문)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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