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올해를 '대권'추방의 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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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권(大權)이란 시대착오적 용어를 우리 사회에서 추방하려면 금년이 가장 적절한 해가 아닐까. 그동안 우리 사회는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2년을 극심한 대권병에 시달려왔다. 대선을 치른 뒤 2년여는 선거에 얽매인 갖가지 악연과 한을 푸느라고 소동을 벌이고 대선을 2년여 앞둔 시점부터는 대권병의 증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현상이 반복됐다. 그렇다면 대통령 임기 5년의 중간에 들어선 올해가 비교적 침착하게 대권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시점이라 하겠다.

*** 대선 2년여 앞둔 지금부터가 중요

민주주의가 일상화된 시민사회에서 아직도 대권이란 봉건적 표현이 거부 반응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문은 차치하고라도 각계 각층에서 날마다 분출되는 국민적 여론과 행동이 생활의 일부가 된 오늘의 한국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맡겨버리는 대권정치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그대로 방치할 문제가 아니다. 지난 57년간 이승만으로부터 노무현에 이르며 고착된 청와대 중심의 국가 운영의 전통과 관행은 국민의 민주적 감각을 쉽게 마비시킬 수 있는 무서운 힘을 지녔음을 보여줬다. 민주화 투쟁의 경력을 발판으로 당선된 대통령도 일단 취임 후에는 청와대의 전통과 관행에 얽매여 버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느냐는 인물 선택보다는 이미 그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대권정치의 관행을 어떻게 개혁하느냐가 한국 정치의 당면 과제라 하겠다.

한국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질적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한국 정치가 겪고 있는 대권병의 폐해를 정치문화와 구조의 차원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치문화의 차원에서 볼 때 많은 정치 지망생들이 목표 설정의 단계에서부터 혼선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 국민들 위에 홀로 우뚝 서서 나라를 대표하고 다스리겠다는 것인지, 많은 동지나 동료와 더불어 국가 운영의 책임을 맡아보겠다는 것인지, 또는 두 가지를 함께하겠다는 것인지 그 목표가 늘 모호하다. 만약 국가 운영의 책임을 지고 당면 과제를 풀어 가는 데 공헌하겠다는 것이 정치 참여의 기본 목표라면 영국의 블레어 총리, 독일의 슈뢰더 총리,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 등이 안정된 민주정치 지도자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권병에 시달리는 한국의 정치문화에선 대통령의 지위를 봉건군주가 지녔던 보위(寶位)나 옥좌(玉座)의 연장으로 보려는 경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태조(太祖) 왕건(王建) 신드롬은 아직도 강력히 작용하고 있다.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왕으로 여기는 정치문화가 대권병을 조장하는 것이다.

우리 대권정치의 부정적 전통을 구조적 차원에서 단순화한다면 '대통령 무책임제'라는 것은 여러 번 지적한 바 있다.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공약을 하고 공언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책임질 방법은 명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행 제도이며 관행이다. 책임질 수 없는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국 운영이나 입법에 관한 일차적 책임을 정당, 특히 여당이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혼란스러운 발상이다.

*** 진지한 개헌 논의도 시작돼야

한국의 정당과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이 국민의 불신과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실질적 권력이나 권한이 없는 정당에 책임만을 추궁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정말 국정 운영의 책임을 묻겠다면 그들이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의회민주주의의 틀을 마련해 줘야 한다. 최소한 정당의 권한이나 책임을 대통령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나가는 제도적 구상이라도 시도돼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때만 되면 대권정치란 드라마에 매혹돼 이미 그 취약성과 한계성이 확연히 노출된 대통령 무책임제를 존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국민적 무관심도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기에 올해를 '대권' 추방의 해로 삼자는 것이다. 대권 지망생들은 일찌감치 '왕건'의 꿈을 버리고 시민재상(市民宰相)이 되겠다는 목표로 자세와 전략을 가다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 개정에 관한 진지한 논의도 시작돼야 할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